2013년 9월 현재, 신강 위구르 자치구는 준계엄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우루무치 사태’ 4주년을 맞은 지난 7월, 소요가 시작된 이래 8월 12일 위구르인 3명이 중국 공안의 총에 맞아 숨지고 26일 일어난 유혈충돌로 최소 16명이 사망하는 등 ‘중국의 화약고’ 신강사태는 현재진행형이다. 7월 26일부터 4일간 신강 위구르 자치구를 직접 다녀온 이종식(대학원·사학과), 공석원(문과대 사학12), 김현겸(문과대 사학12) 씨의 이야기를 토대로 그들의 신강 여행기를 재구성했다.

삼엄한 경계속에 들어온 신장
 

포도관광농장 주인의 여동생이 한족 음악에 맞춰 위구르 춤을 추고 있다.
사진제공 | 이종식, 공석원, 김현겸 씨

기나긴 실크로드 여행의 마지막 코스는 신장이었다. 26일 아침, 둔황(敦煌)에서 일어나 신강으로 출발하려던 중, 일정이 갑작스레 변경됐다. 원래는 둔황에서 간쑤성(甘肅省)을 거쳐 신강 위구르 자치구의 도시 중 하나인 투루판(吐魯番)으로 기차를 타고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소요사태로 신강으로 들어가는 모든 기차편이 일시 중단됐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계획을 변경해 신장 내 도시인 하미(哈密)에서 기차를 타고 투루판으로 이동해야했다. 신장 지역 내 기차는 정상운행이었다.
  하미로 들어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다. 들어갈 때마다 거치는 검문소마다 완전무장을 한 군인들이 엄격하게 검문을 했다. 둔황 등 다른 지역에서 공안이 검문을 하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외국인관광객도 검문은 예외가 아니었다. 일행 중 한명이 사진을 찍으려다 군인에게 걸려 사진기를 빼앗길 뻔 했다. 다행히 사진기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총을 든 군인이 인상을 찌푸리며 따지는 모습에 일행 모두 겁이 났다. 이동은 하루 종일 계속됐고 저녁에 하미에 도착하자마자 몸을 뉘일 새도 없이 야간열차를 타고 투루판으로 이동했다.


신장의 무기력을 느끼다.
 

당나귀 마차로 생계를 꾸려나가는 위구르인들
사진제공 | 이종식, 공석원, 김현겸 씨

해수면보다 낮은 고도를 가진 세계 최저의 분지답게 투루판의 더위는 상상을 초월했다. 햇빛 때문에 긴팔을 입은 일행에게 58℃에 이르는 무더위를 견디는 건 너무 힘들었지만, 신강의 대표 관광도시 투루판을 제대로 둘러보겠다는 일념 하에 일정을 강행했다.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고창고성(高昌古城)이었다. 당나라 때 변방국가 고창국(高昌國)의 수도였던 이곳은 도보로 돌아보기엔 너무 넓어 현지 위구르인들이 당나귀 마차를 끌며 가이드 역할을 하고 있었다. 가난에 찌들어 있는 그들에게 당나귀 마차는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이종식 씨는 “중국은 관광지 요금이 비싼 편에 속하는 국가 중 하나지만, 이 중 위구르인에게 돌아가는 몫은 적을 거예요”라며 안타깝게 말했다. “독립을 외칠 힘이 부족한 위구르인의 무기력함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고창고성을 떠나 일행이 향한 곳은 ‘서유기’의 무대로 유명한 화염산(火炎山)이었다. 화염산은 철분을 다량 함유하고 있어 붉은빛을 띄는 데다 주름처럼 보이는 바위 모습이 겹쳐 단어 그대로 불타오르는 모습이었다. 중국 정부에 의해 관광지로 개발된 이곳은 온통 서유기 관련 기념품가게로 넘쳐났다. 한 곳에 들어가 보니 벽면에 흑백사진 몇 장이 붙어 있었다. 가게 주인에게 물어보니 주더(朱德)와 덩샤오핑(鄧小平)이란다. 화염산을 관광지로 개발한 공산당이 고위급 인사들을 직접 파견해 주민들을 독려하며 찍은 사진이었다. 공석원 씨는 “중국 정부가 신장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라며 “석유에 풍력자원까지 있는 이 땅을 정부가 포기하지 않는 이유는 비단 ‘중화민족’을 지키기 위해서만은 아닐 겁니다”고 말했다.
  27일 포도 재배 농장을 방문했다. 농장 주인은 관광객들을 모아놓고 투루판 특산 과일 시음회를 열었다. 엄청나게 단 단맛에 놀라던 찰나, 주인의 여동생이 들어와 위구르 전통 음악에 맞춰 전통춤을 추기 시작했다. 전통 음악이 끝나자, 주인이 한족 음악을 틀더니 여동생이 음악에 맞춰 다시 위구르 전통 춤을 췄다. 주인은 “‘중화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 이런 프로그램을기 마련했다”고 말했다. 김현겸 씨는 “우리나라로 치면 주인은 친일파라고 볼 수도 있어요. 하지만 현실과 타협했다는 이유로 주인을 무작정 비판 할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보여주는 것만 보다
  투루판과는 달리 소요사태의 본거지였던 우루무치(烏魯木齊)는 고층 빌딩도 다수 세워진 현대식 도시였다. 인종도 위구르인들이 주로 거주했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우루무치는 한족이 많았다. 도시 중앙에 열린 그랜드 바자르의 흥겨운 분위기는 흡사 명동 거리를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여행 내내 느껴지던 중국의 통제는 오히려 우루무치에서 강렬하게 느껴졌다. 7월 5일 발생한 소요사태의 여파를 진압하기 위해 도시 내에는 경찰 대신 군대가 주둔해 있었다. 떠들썩한 분위기에도 군대로 인한 묘한 긴장감이 우루무치에 감돌았다. 얼마 전 사망자까지 낸 소요사태가 있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도시는 겉보기에 ‘멀쩡’했다. 결국 상상 이상으로 철저하게 통제된 우루무치에서 중국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우루무치의 모습 밖에 보지 못했다.
  30일 오후 북경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많은 것을 보았지만, 보게된 건 중국이 보여주고 싶은 북(北)신강의 모습뿐이었다. 남신강의 카슈가르(喀什)나 호탄(和田) 등의 도시에는 여전히 ‘위구르 레지스탕스’들이 공산당에 맞서 독립투쟁을 벌이고 있다. 내심 독립에 대한 신강의 열망을 볼 수 있을까 기대했지만 확인한 것은 소수민족에 대한 중국의 통제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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