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은 오페라의 거장 리하르트 바그너(Richard Wagner, 1813~1883) 탄생 200주년이다. <니벨룽의 반지>, <트리스탄과 이졸데>, <로엔그린>, <파르지팔> 등 위대한 오페라들을 남긴 바그너는 음악극(Muzikdrama)의 창시자이면서도 단순히 음악 제작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바그너는 당대 사상가에게 영향을 받거나 때로는 영향을 주기도 했다. 바그너의 철학적 사상은 그의 음악에서 엿볼 수 있다.

청년 바그너의 아나키즘(Anachism)
  바그너는 처녀작 <요정들(1834)>이 후원자를 찾지 못해 실패한 이후, 자신의 재능을 알아주지 않는 독일 오페라계에 회의감을 가지고 방황한다. 혈기 넘치던 20대 바그너의 고민은 독일 사회 전체에 대한 개혁의지로 바뀌어 당시 바그너는 아나키즘적 사고방식을 수년간 견지하는 모습을 보인다. 바그너는 ‘최초의 아나키스트’ 프루동(Proudhon)의 저작을 읽고 느낀 감명을 일기에 기록하고 국제적으로 명성을 떨치던 아나키스트 바쿠닌(Bakunin)과 교류하는 등 20대 바그너의 ‘아나키스트’적 면모는 상당했다.
  바쿠닌과의 교류는 특히 바그너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바그너는 바쿠닌을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고 표현했고 모든 정부, 체제, 질서를 무너뜨리려는 바쿠닌의 정치적 목표에도 흥미를 보였다. 바쿠닌은 아나키즘 고유의 권위 부정과 파괴적 욕구를 바그너에게 불어넣고자 했고 바그너가 <나사렛 예수>를 구상할 당시 바그너에게 “예수를 아주 나약한 존재로 그려내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다만 바그너의 영적인 불안(바그너는 일생에 걸쳐 종교에 관심이 없는 태도를 보이다가 이후 기독교적 코드에 심취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등 종교에 대해 일관되지 않는 모습을 보였다) 때문에 바쿠닌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나키스트 바그너’는 1849년 이후 사라진다. 1849년 바그너는 드레스덴에서 일어난 봉기에 참여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령을 받고, 스위스로 도망친다. 이후 바그너는 자서전을 쓸 때 청년 시절을 일부러 제외시키는 등 아나키스트적 모습을 젊은 날의 혈기로 남겨두려 했으나 파괴적 욕구만은 오랫동안 남아 있었다. 이는 바그너의 후기 대표작 <니벨룽의 반지>에서 잘 드러나는데, <반지>의 마지막 부분인 <신들의 황혼>에서 신들의 세상이 파괴되어 없어지는 장면이 그것이다. 바그너에게 있어 아나키즘은 젊은 날의 혈기 이상이었다.

“세계를 경멸감으로만 대하도록 하십시오. 달리 상대할 가치가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감으로만 대하도록 하십시오. 절대로 희망의 여지를 두지 말도록...세계는 알베리히(<반지>에 등장하는 권력 지향적 난쟁이)의 것이지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닙니다! 그걸 없애버리십시오!”
1854년 리스트에게 보낸 편지 中

<반지>에 반영된 포이에르바하(Feuerbach)의 신(神)
  드레스덴 봉기 실패 이후 스위스에서 망명하던 바그너는 포이에르바하의 <그리스도교의 본질>을 접하고 큰 영감을 받는다. 평생에 걸쳐 영적 불안감을 드러낸 그에게 포이에르바하는 종교에 관한 길잡이였다. 포이에르바하에 감화된 바그너는 당시 제작하던 <니벨룽의 반지>에 포이에르바하의 철학을 다수 반영시켰다.
  포이에르바하에 따르면, 신을 만든 것은 인간이며 종교를 통해 얻는 모든 것은 결국 인간에 관한 진리다. 또한 인간은 살다보면 자신의 한계를 깨닫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통제력을 일임하는 신의 존재를 만들어낸다. 인간이 만들어낸 초기의 신은 인간을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 비인간적 존재지만 인간과 함께 울고 웃는 인간적 성격을 지닌다. 고대 그리스나 북유럽 신화의 신들이 이에 해당한다.
  <반지>의 주인공들은 모두 포이에르바하가 주장한 초기 단계의 신들이다. 지그프리트, 보탄, 브륀힐데 등 <반지>의 신들은 초(超)인간적 능력과 인간적 성격을 동시에 지닌다. <반지>는 그들의 활약, 기쁨, 슬픔을 담아내는 한편 마지막 장 <신들의 황혼>에서 신들의 몰락까지도 그려낸다. 김문환(서울대 미학과) 명예교수는 “포이에르바하의 신을 통해 바그너가 주장하고 자 한 것은 사랑이 결국 모든 것의 해답이 된다는 것”라고 말했다. 이는 바그너가 ‘포이에르바하 종결부’라고 지칭한 <신들의 황혼> 후반부의 브륀힐데의 대사에서 드러난다.

신들의 종족이
한숨처럼 사라져 갔지만,
...(중략)
재산도, 황금도
신 같은 허세도 아니고,
집도, 훈장도,
귀족의 영광도 아니며,
...(중략)
기쁨과 슬픔의 축복을 받은
사랑만이 할 수 있는 것을

<트리스탄과 이졸데>와 쇼펜하우어(Schopenhauer)
  바그너는 1854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고 쇼펜하우어를 처음으로 접했다. 당시 혼란스러운 유럽 정세로 인해 비관주의와 우울증을 앓고 있던 바그너에게 ‘인간의 삶은 고난으로 가득 차 있고 언제나 힘겨운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게 인간의 숙명’이라는 쇼펜하우어의 주장은 혁신적이었다. 쇼펜하우어는 끊임없는 고난을 예술, 특히 음악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봤으며 바그너는 이후 ‘구원’의 키워드를 자신의 작품에 투영한다.
  <트리스탄과 이졸데>에서 나타난 무한선율기법은 쇼펜하우어가 주장하는 인생의 끝없는 고통을 나타낸다. 또한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비극적인 사랑, 그들의 죽음 뒤에 찾아오는 하늘로의 구원은 쇼펜하우어의 비관적 세계관과 예술을 통한 ‘구원’ 키워드를 드러낸다.

“쇼펜하우어가 만들어준 정신의 성실한 틀이 이제 그 근본적인 특징을 열정적으로 표현하라고 요구함으로써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발상을 떠오르게 한 부분적인 원인이 되었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바그너 著  <나의 생애>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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