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은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폐/ 포화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가을 하늘을 생각게 한다.’
  한국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김광균(1914~1993) 시인의 ‘추일서정(秋日抒情)’의 일부다. ‘추일서정’은 고독하고 메마른 가을의 풍경을 ‘낙엽’, ‘풀벌레 소리’, ‘구부러진 철책’ 등의 사물을 통해 감각적으로 그려낸 시다. 이처럼 우리 주변의 사물을 지나치지 않고 시적 의미로 재탄생 시킨 김광균의 시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우리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다.

  김광균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오영식 ‘근대서지’ 편집장과 유성호(한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가 ‘김광균 문학전집’(소명출판)을 발간했다. 이번 전집엔 기존 전집에선 볼 수 없었던 김광균 시인의 시집 ‘와사등’ 초판을 비롯해 모든 시편을 원형 그대로 수록했다. 전집에 해설을 쓴 유성호 교수는 “한국의 중요한 모더니스트인 김광균 시인의 제대로 된 전집을 만들어보고자 했다”고 말했다.

 사라져가는 것들에 집중하다
  김광균 시인이 작품 활동을 하기 시작한 1930년대에 한국시는 내용과 형식적 측면에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대표적인 흐름이 바로 모더니즘이다. 과거의 전통적인 사상, 형식, 문체를 벗어나 이미지를 중시하고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도 비추는 모더니즘은 감각보다는 정서를 중시했다.

  이 무렵 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시가 바로 김광균 시인의 ‘와사등’이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라는 첫머리로 시작하는 시는 당시 도시 문명 속에서 방향성을 잃어버린 현대인이 느끼는 고독과 비애를 잘 담고 있다.

  와사등, 즉 가스등은 모든 곳을 밝게 비추진 못하지만, 그 주변은 환하게 비춘다. 빛의 범위가 넓지 않은 만큼, 낭만적이면서도 따뜻한 정서를 전달하는 사물일 수 있다. 그러나 김광균이 그려내는 와사등은 로맨틱한 대상이 아닌, 슬픔의 정서를 전달하는 매개체다. ‘창백한 묘석같이’, ‘무성한 잡초인 양’ 등 사물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표현을 통해 ‘와사등’이 갖는 고독함과 우울함을 독자에게 전달한다. 유성호 교수는 “시 속에서 ‘나는 슬프다’라고 직접 말하기보다 사물에 정서를 입혀 드러냄으로써 누구나 자신의 슬픔을 시에 이입해서 감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김광균 시인의 시는 시적 배경이 주로 봄, 여름이 아닌 가을, 겨울이다. 쓸쓸함과 고독이 자주 드러나며, ‘기울어가는 석양’, ‘꺼지는 등불’ 등과 같은 하향적 표현도 쉽게 찾을 수 있다. 유성호 교수는 그가 ‘따뜻한 모더니스트’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는 김광균 시인을 “사람을 사랑하고 사라져 가는 존재들에 대해 애태워한 시인”이라 표현하며, “우리 주변에서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저물어 가는 석양처럼 기울어가는 존재들에 대한 시선을 놓치지 않은 것”이라 설명했다.

 감각과 감각을 자유롭게 넘나들다
  1930년대 모더니즘의 주된 경향은 이미지즘과 결합해 선명한 이미지를 제시하는 데 있다. 이를 가장 뚜렷이 표현한 시인이 바로 김광균이다. 김광균 시인의 시는 반짝이는 강물과 푸르른 산을 그려내는 수채화보다는, 기울어지는 석양 아래 애상적인 분위기를 보여주는 유화에 비유할 수 있다. 김광균 시인의 시가 선명하면서도 애잔한 이미지를 담을 수 있는 것은 그가 회화적 상상력에 뛰어났기 때문이다. 김광균 시인은 인상파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회화적 풍토를 시적으로 조형하는 데 부단히 노력했다. 

  김광균 시인의 이미지즘은 두 가지 이상의 감각을 결합시켜서 복합적으로 표현하는 ‘공감각적 표현’의 사용에서 두드러진다. 그의 시 ‘설야’에서 눈 내리는 풍경조차도 청각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구절인 ‘머-언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대표적이다. 반대로 ‘외인촌’의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는 종소리라는 청각적 심상을 시각화해서 표현했다. 이처럼 김광균 시인은 감각과 감각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하나의 선명하면서도 은은한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특히 시각적 이미지의 경우 색채의 명도와 채도까지도 섬세하게 표현해 회화적 효과를 가중시켰다.

  유성호 교수는 김광균 시인의 이미지즘, 그리고 사물을 보는 시선이 우리에게 ‘문학사적 원료’로 작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광균 시인은 어떤 사물에 대해 그것의 외관뿐만 아니라 소리와 향기 등 까지 모두 한 데 어울려 표현하려 했다”라며 “우리가 사물이나 풍경을 볼 때 그것을 공감각적으로 조형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심장에서 작동한다면, 김광균 시인의 시를 떠올려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차단한’의 심미적 해석
  시인 중에는 자신만의 ‘개인 방언’을 가진 경우가 적지 않다. 개인 방언은 자기가 표현하고자 하는 의미를 담아 스스로 말을 만들어 내는 것으로 시적 의미를 극대화하기 위해 사용한다. 김광균 시인은 개인 방언이 거의 없는데, 유일하게 하나 있다면 바로 ‘차단한’이라는 표현이다. ‘차단한’ 이라는 어휘만 들어도 김광균 시인이 떠오를 정도로 그의 시 속에서 이 표현은 자주 등장한다. 이는 근현대 다른 어떤 시인도 사용하지 않은, 김광균 시인만의 조어(造語)다. ‘차단-한 등불’이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와사등’뿐만 아니라 ‘한 줄기 빛도 향기도 없이 호올로 차단한 의상을 하고’(설야), ‘어둔 천정에/ 희부연 영창 위에/ 차단한 내 꿈 위에/ 밤새 퍼붓다’(등) 등 김광균 시인의 여러 시에서 ‘차단한’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김광균 시인이 개인적으로 만든 단어인 만큼 그동안 이에 대한 해석이 다양했다. ‘차고 단단한’, ‘차디찬’, ‘차단(遮斷)한’ 등 여러 견해가 뒤섞였었다. 그러나 유성호 교수는 ‘차단한’에 대해 “흐릿하고 몽롱한, 실체가 분명치 않은 느낌을 전하는 말”이라고 말한다. ‘차단한’이라는 단어가 쓰인 김광균 시인의 모든 시를 모아서 분석해본 결과 이 뜻이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광균 시인은 ‘차단한’이라는 어휘를 만들면서 어떤 의미를 전달하고자 했을까. 유성호 교수는 “자신의 상실감과 슬픔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내 호올로 어델 가라는 슬픈 신호냐’라는 구절이 식민지 도시의 암담하고 비애 어린 상황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방황하는 도시인의 절규로 읽히듯, ‘차단한’이라는 말을 통해 차가운 가스등만이 빛나는 황량하고 쓸쓸한 1930년대 식민지 도시를 연상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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