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띵동’ 문자 알림이다. 반사적으로 휴대폰으로 손이 향하다 멈췄다.  5/4 임종~ 으로 시작하는 문자. 오늘만 두 번째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문자를 읽었다. ‘5/4 임종 OOO(XX병원 장례식장), 5일 입관, 6일 발인.’ 한 분이 또 좀 전에 방금 임종을 맞이했다는 문자였다.

▲ 본교 구로병원 호스피스 병동에서 봉사자와 환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 | 서동재 기자 awe@

주변 친구들에게 호스피스 센터에서 봉사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만류하는 친구들이 더 많았다. “호스피스 센터가 뭐야?”라는 질문부터, “어휴, 왜 하필 거기야. 거의 돌아가시기 직전 분들이 오시는 곳이잖아...”, “그거 한번 다녀오면 기 빠질 꺼 같은데...”라는 말까지. 나는 호스피스에 대해 설명하면서 “야, 너네 나 멘탈 강한 거 알잖아”라며 친구들을 안심시켰다.
우연히 호스피스 병동 제도와 올바른 죽음에 대한 뉴스를 봤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내 죽음은 어떤 모습일까. 난 살면서 죽음에 대해 얼마나 생각해봤나. 죽음에 대해 무지했던 나였다. 고등학교 동창의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빼고 장례식에 가본 적도 없었다. 병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죽은 사람도 보지 못했다. ‘올바른 죽음’이란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죽음이 어색한 내가 죽음을 가까이에서 봤을 때 어떤 변화가 나타날까 궁금하기도 했다.
마침 가톨릭대학교 성모병원에서 호스피스 교육이 있었다. 교육에서 호스피스에 관한 올바른 이해, 완화의료와 말기 암환자의 심리 상태 등을 배웠다. 호스피스 봉사자에는 일정 조건이 있었다. 1년 이내 의미 있는 근친상을 경험한 사람을 지원할 수 없다. 특정 종교의 목적으로 봉사활동을 하려 하는 사람도 제외대상이다. 3일 동안 진행된 교육을 이수하고 서류접수와 수녀님 면접을 통과했다. 그렇게 난 호스피스 수습봉사자가 됐다.
호스피스 봉사자가 되면 비밀보장서약서를 쓴다. 호스피스 병동에서 보고 들은 환자에 대한 이야기는 외부에 발설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기사의 발행과 내용은 성모병원 관계자의 허락을 맡았다) 서약서를 읽고 잠시 망설이자 선배 봉사자가 말했다. “호스피스 봉사는 일반 봉사랑은 달라요. 지켜야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냐. 배우는 자세로 마음가짐 단단히 해야 버틸 수 있을 거예요.”
총 24시간에 걸친 교육에서 호스피스 병동과 죽음에 대해 올바르게 알고 배웠지만 수습 첫날부터 난 울고 말았다.

난생 처음 마주한 죽음의 그림자
호스피스 병동에는 특유의 냄새가 있다. 소독약과 알코올 냄새 그리고 오래 묵은 사람 냄새가 섞인 냄새. 그 냄새는 임종을 앞둔 환자의 병실일수록 더 심했다.
봉사 시작 전 봉사자들은 회의를 통해 오늘 입원한 환자가 누군지, 지난 밤 임종한 환자는 없는지 확인했다. 환자마다 가족사, 경제상황, 병으로 인한 통증 부위 등의 유의사항이 있었고 그걸 항상 유념해야 했다.
첫날부터 난 공교롭게도 임종 직전의 환자를 마주했다. 회의가 끝나갈 무렵 간호사가 봉사자실 문을 두드렸다. “30X호 환자 분 임종 다가오신 것 같아서요. 임종 전 기도 해드려야 할 것 같아요.” 환자의 종교를 살핀 후 기도서를 들고 병실로 향했다. 1인실에 있던 환자였다. 그리고 난생 처음 임종을 앞둔 환자를 마주했다.
병실에 들어서자 익숙치 않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가족들에게 둘러싸인 채 침상에 누워있는 환자가 보였다. 눈을 감고 입을 연채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입에는 거즈가 붙어있었다. 분비물 때문이었다. 환자의 흉부가 불규칙적으로 크게 움직였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는 얼굴빛이 창백했다. 가족들이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도 눈물을 흘린 모습이었다. 선배 봉사자가 다가가 환자의 다른 손을 잡았다. “XXX님 위해서 기도해 드리려고 봉사자 분들이 왔어요. 혹시 환자분께서 평소에 좋아하시던 성가가 있으셨으면 말씀해주세요.” 위탁의 기도를 마치고 환자분이 좋아하시던 성가를 불러드리고 주기도문을 외웠다. 그렇게 임종 전 기도는 끝이 났다. 가족들은 감사를 표했다. 기도 후 선배 봉사자가 환자 아내의 손을 잡았다. “끝까지 곁에 있어주시고 좋은 말씀 많이 해주세요. 의식이 없는 것처럼 보여도 다 듣고 계세요. 힘내세요.” 예상했던 죽음이었지만 아내는 아직 준비가 안 된 듯 했다. 그들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병실을 나오자 두 손이 덜덜 떨렸다. 선배 봉사자가 내 손을 잡아줬다. “처음 본 거지? 처음엔 놀랄 수 있어요. 좀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에도 환자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사람이 죽기 전에 이런 모습이구나.’ 애써 덮어두었던 죽음에 대한 무서움이 다시 올라왔다. 상상만 하던 죽음의 모습과 현실은 달랐다. 보다보면 괜찮을 거라고 울음을 삼켰지만 죽음을 맞는 중인 환자와 그 옆에서 슬퍼하는 가족을 본다는 건 절대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 먼저 말을 걸었다면

호스피스엔 생각보다 훨씬 젊은 환자도 들어온다. 내가 있던 기간 동안 가장 어렸던 아이는 18살이었다. 봉사자와의 소통이 힘든 아이였다. 그 아이가 얘기하는 걸 난 보지 못했다. 계속 집에 가고 싶어 한다고 했다. 수줍음이 많은 성격인데다 4년간의 투병생활에 지친 듯 했다. 투병 중 잠시 상태가 호전돼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준비하고 희망을 가졌었단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병은 재발했다. 아이는 꿈을 포기한 채 호스피스에 들어왔다.

환자들에게 기도를 드리기 위해 라운딩을 돌 때였다. 어둡고 고요한 4인실 병실. 창가도 아닌 자리에서 아이는 항상 커튼을 치고 있었다. 같은 병실의 환자들은 모두 60대 이상의, 죽음을 목전에 둔 환자였다. 통증으로 아파하는 환자들의 신음소리가 이따금씩 들렸다. 하지만 커튼 안쪽에선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침 수녀님이 아이의 보호자와 면담을 위해 커튼을 걷었다. 그 잠깐 동안, 아이의 뒷모습을 봤다. 고개를 숙이고 바닥을 응시한 채 침상에 걸터앉아있었다. 축 늘어진 어깨는 10대의 의 뒷모습이라 할 수 없었다.
다음 주에 봉사를 오면 봉사자 중엔 가장 나이가 어린 내가 말이라도 걸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4년 동안 또래 친구들과 지내지 못했으니 아이의 시계는 2010년에 멈춰있겠지. 그 때 유행하던 노래나 인기 있던 걸그룹이 누가 있었는지 찾아봤다. 무슨 말을 해주면 아이가 마음을 열 수 있을지 고민했다.
하지만 난 그날 이후 아이를 만나지 못했다. 다음 봉사를 가기 전 아이의 임종 문자를 받고 말았다. 그 아이는 결국 집으로 퇴원을 하게 됐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했다. 선배 봉사자가 “자살했어”라는 말을 했을 때 내가 잘못한 것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죽음과는 거리가 먼, 가장 빛나야 할 18살 나이인데. 스스로 죽음을 앞당길 만큼 힘들었을까. 아무리 이곳이 싫었어도 자살이라니. 그 이야기를 들은 날, 친구를 붙잡고 엉엉 울고 말았다. 울음은 쉽게 그쳐지지 않았다. “너무 미안해...” 울면서 이 말만 되뇌었다. 내가 그날 용기를 내 말을 걸었다면, 눈이라도 마주쳤다면, 그 아이는 생각을 바꿨을 수도 있었을까. 조금이라도 천천히 죽음을 마주하지 않았을까.
그 아이를 보내고 호스피스 봉사에 자신이 없어졌다. 죽음을 앞둔 그들에게 살아있는 나는 어떤 존재일까. 매 환자마다 감정이입이 된다면 내 심리상태는 산산조각이 날 것 같았다. 어느샌가 나는 환자의 상황에 거리감을 두려하고 피하려 했다. 동시에 나는 점점 그 일 때문에 죽음에 무감각해지기도 했다. 그런 자신이 이질적으로 느껴지기도 했더. 아무리 주변사람이 아니어도 이렇게 죽음에 무뎌지다니.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수습기간이 끝나갈 무렵, 동갑내기인 23살 환자가 입원했다. 원피스를 입은 친구들이 면회를 왔다. 누워있는 환자 앞에서 친구들은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어색한 듯 웃음을 지었고 대화는 끊겼다. 병상에 누워있는 친구를 보는 저들도, 환자도 지금 상황이 익숙하지 않은 듯 보였다. 18살 아이가 생각났다. 병실에 들어가 볼까, 말이라도 걸어볼까 생각했지만 이번엔 도무지 용기가 안 났다. 가까이 하면 저번과 똑같은 슬픔을 겪을 것 같았다. 나는 다가가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삶과 죽음의 차이
봉사를 시작한지 2개월쯤 지났을 때 나는 임종 후의 환자를 처음 만났다. 호스피스 센터에는 임종 과정 중인 환자를 위한 임마누엘 방이 있다. 임마누엘 방에는 가족들을 위한 소파와 테이블, 기도서 등이 있다. 창문도 일반 병실보다 좀 더 크다. 창가에는 화분들이 빛을 받으며 있었다. 임종 전 기도는 서너 번 해본 상태라 임종 기도도 비슷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살아있음과 죽음은 달랐다.
임마누엘 방에 들어서자 나와 비슷한 나이의 자녀 두 명이 환자를 바라보며 울고 있었다. 환자는 두 자녀를 둔 50대 어머니였다. 우리 엄마와 비슷한 나이였다.
기도를 위해 환자 곁에 섰다. 환자는 반듯한 정자세로 침상에 누워있었다. 머리는 짧았고 얼굴에 온기는 없었다. 임종 진단을 받았지만 어깨까지만 이불이 덮여있었다. 호스피스 환자는 호흡기나 심장 박동기를 차고 있지 않다. 의사가 임종을 진단하면 그 순간이 환자의 임종이었다. 삶과 죽음의 경계는 허무하리만치 가까웠다.
기도를 시작했다. 임종 기도는 일반 기도와 다르다. 망자가 좋은 곳에 가길 빌어드리고 사별 가족이 된 이들을 위로한다. 기도가 끝날 때쯤 아버님이 들어오셨다. “감사합니다.” 담담한 표정이었다. 선배 봉사자가 말했다. “좋은 곳 가셨을 거예요. 그리고 청력은 아직 남아계실 수 있으니 못 다한 말씀 있으시면 꼭 하세요. 그럼 시간 나누세요.”
얼굴까지 이불이 덮이고 병실을 나가면 환자는 가족들에게 그리움의 대상이 될 것이다. 죽음이 무섭거나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과 무관하게 결국 남겨진 사람들에게 죽음은 ‘부재’였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는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다. 내가 처음으로 마주한 죽음은 허무했다. 아니 공허했다.
환자 얼굴도 기억에 남았지만 담담하던 아버님의 표정이 잊혀지지 않았다. 가족을 보낼 준비를 마쳐서 일까 아니면 슬픔을 억누르는 것일까. 50대 어머니를 잃은 가족은 앞으로 어떤 일을 겪을까. 사랑하는 이의 빈자리를 인정할 수 있을까. 여러 생각이 스쳐 지났다.
집에 돌아와 부모님을 보자마자 눈물이 났다. 오늘 일을 얘기하지 못한 채 건강검진을 꼭 받으라고, 왜 병원에 자주 가지 않느냐고, 오래 살아야한다고 부모님을 나무랐다.

마지막에서야 이뤄지는 용서
봉사를 하면서 제일 씁쓸했던 점은 죽음에 이르러서야 하게 되는 ‘용서’였다. 봉사자들의 기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위탁의 기도’, ‘용서를 위한 기도’, ‘사랑의 기도’, ‘가정을 위한 기도’ 등 다양하다. “오늘은 어떤 기도를 해드릴까요?”라고 물으면 많은 환자들이 용서를 위한 기도를 청한다. 기도서를 들고 환자 침상을 둘러싼다. 선배 봉사자가 침상 옆에 웅크려 앉아 기도문을 읽는다. “그 누구를 그 무엇을 용서하고 용서받기 어려울 때마다 십자가 위의 당신을 바라봅니다...(중략)” 환자는 묵주를 꼭 쥐고 기도를 듣다가 하염없이 눈물을 흘린다. 봉사자가 손을 잡아주면 흐느낌은 더 심해진다. 기도가 끝나고 성가를 부른다. ‘사랑의 송가’를 골랐다. 눈을 감고 봉사자들의 노래를 듣는다. 환자가 안정을 찾는다.
수녀님을 붙잡고 용서를 구하는 환자도 있었다. 면담을 위해 커튼을 치면 이윽고 울음소리가 들린다.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가장 어렵지만 인간이라면 모두가 해야 하는 것이었다.
호스피스 병동은 대체적으로 고요했다. 응급실과 같은 긴박감은 없고 역동적이지도 않다. 모든 것이 예정돼 있다는 듯, 준비 중이라는 듯 차분하다. 밤에 섬망(일종의 환각증상으로 헛소리, 소리지름 등을 동반한다)과 심한 통증을 겪는 환자들은 낮에 대부분 수면을 취하기 때문이다.
존엄한 죽음을 위해선 진통제에 의한 통증 조절이 필수적이다. 아프지 않더라도 진통제를 규칙적으로 맞아야 진통효과를 낼 수 있다. 환자가 통증을 호소하면 보호자가 간호사를 부른다. 진통주사 한방에 표정이 편안해진다. 일부 환자들에겐 마약성 진통제도 투여된다. 약에 의존해 깨어있는 환자들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거나 창문 밖을 하염없이 응시했다. 그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존엄한 죽음을 돕는다는 것
봉사를 하면서 가장 많이 느꼈던 허무함을 이길 수 있었던 건 내가 한 사람의 인생의 마무리를 더 낫게 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봉사자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 많다. 환자 혹은 보호자와 대화, 기도 및 성가 부르기, 발 마사지, 목욕, 산책 시켜드리기, 환자 자세 변경, 시트 갈기, 장례식장 기도, 사별 가족 면담 등 다양했다.
호스피스 병동의 목욕은 일반 목욕과 좀 다른 의미를 가진다. 호스피스 환자들은 1-2주에 한번 씩 목욕을 한다. 언제 임종할지 모르는 환자들이기에 목욕의 의미 또한 남다르다. 지금 내가 해드리는 목욕이 환자의 생애 마지막 목욕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봉사에 임한다. 목욕을 하고 나면 환자의 얼굴에 생기가 돈다. 목욕 봉사에 들어가는 날이면 쌓였던 허무함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됐다.
80대 환자를 침상 산책시켜드린 적이 있었다. 거동이 불편한 환자여서 침상 째 원내 공원으로 옮겼다. 병원 생활을 오래해서 한 달만에 밖에 나오는 것이라고 했다. “내가 아프기 전에는 걸어 다니는 걸 좋아했는데... 입원하고 계속 안에만 있으니까 힘이 빠져.” 밖에 나오니 표정도 훨씬 편안해 보였다. 공원의 철쭉 꽃봉우리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함께 산책 나온 아들내외는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햇빛이 좋아 다행이었지만 그래도 20분 정도가 최대였다. 들어가기 전 사진을 찍어달라는 부탁에 사진을 찍어드렸다. 아들내외도 고맙다고 연신 인사를 했다. 바깥에서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줘서 고맙다는 인사였다.
엿새 후 나는 그 분의 임종문자를 받았다. 사진 찍으실 때 희미하게나마 웃으시던 그 분의 얼굴이 생각났다. 그것이 그분의 마지막 산책이었다.

20대 봉사자에게 미친 영향
봉사활동을 시작한지 3개월이 지났다. 수습기간을 마쳐가는 지금, 정규봉사자가 될 것인지를 선택해야 하는 시점이다. 지금까지도 답을 내리지 못했다. 계속되는 허무함에 기가 빠졌다. 저 사람도 젊었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성공도 했고 사랑하는 가족도 있을 텐데. 지금은 병상에 누워 죽음을 기다리고 있구나. 내가 죽음을 맞을 때 난 무슨 생각을 할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봉사를 시작한 3개월 내내 죽음에 대한 고민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 기분이 너무 싫기도 했다. 20대라는 젊은 나이였기에 반복적인 죽음을 자진해서 느끼고 싶지는 않았다. 같이 수습 봉사자로 들어왔던 20대 봉사자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다고 했다.
3개월 동안 난 많이 변했다. 친구들에게 후회 없이 살자, 건강하자는 말을 습관처럼 했다. 그리고 4월부터 한 달에 한 번씩, ‘내일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고 생각하고 일기를 적었다. 일종의 유서였다. 그때마다 나는 한 달 동안의 삶을 돌아봤고 무엇을 후회할 것 같은지 되새겼다. 일기를 적은 후에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지금 하고 싶은 일, 지금이 아니면 안 될 일이라면 무조건 했다.
2주일 이상 호스피스에 계신 환자분들은 거의 없었다. 그들에겐 ‘다음에 해드릴게요’라는 말이 소용이 없었다. 18세 환자에게 했던 ‘다음’이라는 다짐이 무의미했듯이 호스피스에 다음이란 없다. 죽음을 지켜보며 느꼈던 첫 번째 감정인 허무함에 대한 반작용이었을까. 삶의 순간순간에 대한 무게감이 달라졌다. 그 허무함과 무게감이 교차하는 것이 죽음이었다.
두렵고 멀게만 느껴졌던 ‘죽음’에 대한 생각도 바뀌었다. 봉사하기 전 내게 죽음은 ‘끝’, ‘어둠’, ‘고통’, ‘삶의 대척점’이었다.
봉사를 하면서 20명이 넘는 환자를 보냈다.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보면서 3개월 내내 죽음이란 무엇일까 고민했다. 죽음은 당사자에게는 우리에게 삶을 용서하고, 돌아보고, 마무리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했다. 끝이 아닌 과정으로서, 죽음도 삶의 한 영역이었다. 내가 느낀 죽음은  영국의 시인 엘리자벳 B. 브라우닝이 말한 것과 가장 비슷했다. “삶은 죽음에 의하여 완성된다.”

 

본지 기자는 본 기사를 위해 일주일에 평균 8시간씩 3월 3일부터 5월 23일까지 3개월 간 수습봉사자로 활동했다. 기사에 등장하는 병원명과 환자명은 모두 익명으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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