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준아, 넌 우리에게는 든든한 아들이고, 여동생에겐 항상 함께해주는 오빠이며 주변 친구들에게 인기가 많은 아들이란다.”
22일 오후 6시, 서울 양천구에 위치한 서남병원에서 손영준(남·27) 씨를 만났다. 불 꺼진 입원실에는 손영준 씨와 그의 아버지 손상현(남·55) 씨만 있었다.
손영준 씨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는 미동이 없었다. 아버지는 손영준 씨 곁으로 다가가 귀에 대고 말했다. “영준아. 여기 손님이 오셨어. 인사해야지.” 그래도 손영준 씨는 답이 없었다. 멀뚱히 바라볼 뿐이었다.
손영준 씨는 저산소성 뇌손상으로 인해 뇌의 일부가 손상돼 식물인간 상태다. 부분적으로 감정표현은 가능하지만 기억할 수 없고 자율적으로 움직일 수 없다. 손상현 씨는 아들의 자세를 시간마다 바꿔줘야 하고 영양분은 수시로 코와 위가 이어진 관을 통해 넣어줘야 한다. 씻겨주고 대소변을 가려주는 것은 기본이다. 손영준 씨는 도대체 왜 이렇게 됐을까. 손상현 씨는 그의 아들이 ‘의료사고’ 때문에 식물인간이 됐다고 주장했다. 손상현 씨의 기억에 의존해 사건을 되짚어봤다.

▲ 식물인간 손영준(남27) 씨의 가족은 의료수가 적용문제로 한 병원에 두 달 이상 있을 수 없다. 병상 밑으로 손 씨의 짐이 보인다. 사진 | 장지희 기자 doby@

그에게 닥친 불행
2007년 2월 3일, 손영준 씨에게 불행이 찾아왔다. 치킨 배달을 위해 오토바이를 탄 손 씨는 양화대교 사거리를 건너던 중 신호를 위반한 봉고차에 치였고 그 후 의식을 잃었다.
이후 손영준 씨는 119 구조대에 의해 병원에 이송됐다. 손상현 씨는 병원에 도착했을 때를 회상했다. 그때 그의 아들은 정강뼈가 부러지고 발목이 꺾여 있었다. “달려가니 응급실에서 영준이가 ‘아파요 아파요’하고 소리치고 있었어요.”
다음 날 1시경 손상현 씨는 수술동의서에 서명했다. 하지만 그는 마취동의서에는 서명하지 않았다. “마취 담당 의사를 직접 보고 설명을 들은 후 서명하려고 잠시 보류했어요.” 그 후에도 그는 마취동의서에 서명하지 못했다. 또 그는 선택 진료하기로 결정했다. 선택 진료란 환자가 특정 의사를 선택해 그 의사로부터 진료를 받는 제도를 뜻하며 환자는 병원에 추가비용을 지불해야한다.
수술은 오후 2시 30분경에 시작됐다. 손상현 씨는 주치의로부터 수술에 관한 설명을 들었다. “당시 주치의가 ‘수술은 2시간 30분이면 끝날 것’이라고 말했어요.” 이후 4시 45분경, 응급상황이 발생했다는 안내음이 병원에 울려 퍼졌고 의사 5~6명 정도가 급하게 수술실로 들어갔다. “갑자기 응급상황이 발생했는지 막 급하게 뛰어가더라고요. 우린 그게 영준이일 것이라는 생각을 전혀 안했어요.” 손상현 씨는 이후 8시까지 아들을 보지 못했다. 8시가 되자 정형외과 교수가 손상현 씨를 찾았다. “그때 정형외과 교수가 그에게 ‘수술 도중 심정지가 왔고 응급상황이 발생했지만 다행히 목숨을 살렸으니 우선 중환자실로 보내자’고 말했어요.”
이후 중환자실에서 손상현 씨 부부는 영준 씨를 기다렸다. 어려운 이야기를 꺼내며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던 손상현 씨도 그때를 회상하자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병상에 누운 영준이가 눈이 뒤집혀 흰자만 보였고 눈물 콧물이 범벅이 돼있었어요. 저희가 영준이의 손을 잡았는데 갑자기 영준이가 손을 꽉 잡으며 파르르 떨었어요.” 중환자실에 도착한 손영준 씨의 호흡은 매우 가빴다.

가족에겐 가혹한 판결
그 후 손영준 씨는 깨지 못했다. 수술이 마무리되지 않은 채 응급상황이 와 그의 양쪽 발은 현재 몸 안쪽으로 꺾여 있다. 손상현 씨는 이 사건이 의료과실이라 생각해 진료기록부를 확보했고 2011년부터 병원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했다. 그는 의료과실 여부를 입증하기 위해 진료기록부를 갖고 여기저기 뛰어다녔다. “길 가는 사람 붙잡고라도 물어보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소송 결과, 손영준 씨 가족은 1심, 2심, 3심에서 모두 패소했다. 병원 측이 무죄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손상현 씨는 억울하다고 했다. 그는 왜 억울한 것일까. “여러 가지가 상식적으로 말이 맞지 않는데 병원 측이 무죄라는 것이 납득이 안돼요.” 그가 이번 일이 의료과실이라고 의심하는 가장 큰 이유는 경과기록지와 마취기록지가 일치하지 않다는 점이었다. “경과기록지에는 영준이가 4시 45분경에 응급상황인 것으로 나와 있어요. 하지만 마취기록지에는 6시 45분으로 표기돼있죠. 이렇게 다른데 어떻게 병원 측 자료를 신뢰해 무죄를 선고할 수 있죠?” 2012년부터 의료인이 진료기록부를 허위 작성하면 형사처벌 받는다. 하지만 손상현 씨가 소송했던 2011년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것이 그를 더 억울하게 만들었다.
손상현 씨가 무엇보다 억울한 것은 그의 아들을 마취한 것이 전문의가 아닌 레지던트 1년차 전공의라는 점이다. 그는 그 점이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알고 보니 영준이를 수술한 것은 레지던트 1년차 의사였어요. 선택 진료를 했음에도 불구하고요.” 그는 선택 진료했던 영수증을 내밀었다. “나중에 병원에서는 영수증을 보고 ‘직원의 실수로 선택 진료비를 청구했다’고 진술했어요.” 고개를 푹 숙인 손 씨는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전 마취동의서에 서명한 적이 없어요. 그런데 나중에 병원 측에서 제 서명이 기입된 마취동의서를 법원에 가져왔더라고요. 기가 찰 노릇이죠.” 그에게 당시 판결에 관해 묻자 그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시 고등법원의 재판관님께서 ‘이 사건의 진실은 레지던트 1년차 전공의와 신만이 알 수 있다’고 말했어요. 이게 어떻게 판결입니까.”

외로운 싸움의 시작
이후 손 씨 가족의 고난은 시작됐다. 손영준 씨가 사고를 겪은 후 그의 어머니는 아직까지 공황장애와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그의 어머니는 극심한 우울로 자살시도를 한 적도 있었다. 손상현 씨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했다. “많게는 일주일에 한 번씩 법원에 다녀왔고 또 간병인이 쉬는 날엔 하루종일 병원에 있었어요.”
현재 손 씨는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작은 가게를 하나 운영하고 있다. “회사 차원에서 배려도 많이 해주고 위로금도 줬지만 일주일에 1~2번씩 빠져야만 하는 저를 돌이켜봤을 때 회사에 미안해서 다닐 수가 없었어요. 또 제가 회사에 있어도 머릿속은 영준이 생각뿐이었어요.” 그에겐 가족을 지켜야한다는 책임감의 무게가 커졌다. 경제적 무게감은 어떨까. 현재 손영준 씨를 위해서만 가족이 부담하는 돈은 한 달에 500만원이다. “간병비 300만원, 병원입원료 150만원, 갖가지 생필품까지 합하면 월 500만 원정도 들어요.” 경제적 부담이 크지 않냐는 질문에 손 씨는 가진 재산을 다 털었다고 말했다. “모아둔 재산을 다 잃었죠. 또 가게를 돌봐줄 사람이 없으니 임대료, 재료비, 인건비를 빼면 남는게 없어요.” 그는 그의 가족을 시한부 인생에 빗댔다. “은행 대출이 끊기는 날, 영준이는 어떻게 되는 거죠? 절벽이 뻔히 보이는데 앞으로 가고 있고, 멈출 수 없는 느낌이에요.”
“우리 아이도 저렇게 됐겠지”
오후 8시가 되자 어두워졌다. 불이 꺼져있던 병실도 자연스레 어두워졌다. 그에게 ‘영준이 또래인 20대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냐’고 묻자 어둠 너머로 그의 목이 메이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 아내가 영준이 친구들이 병원에 오는 것이 싫다고 했어요. 건강했던 영준이 모습이 생각나서… 우리 아이도 저렇게 됐겠지, 여자 친구도 사귀고 취업준비하고…”
손상현 씨는 몇 번이고 세상을 등지려고 했다. 가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는 그의 아들을 생각한다. “병원에 있을 때 ‘확 죽어버릴까’라 생각했지만 영준이가 눈에 밟혔어요. 내가 없으면 쟤를 누가 돌보나요. 저는요, 영준이보다 하루만 더 살고 싶어요.” 그리고 그의 목소리가 바뀌었다. “병원 측에 무죄를 선고하고 나니 저희에게 남는 것은 하나도 없었어요. 거짓이 진실을 이겨버리니까. 남은 것은 병원에 면죄부를 준 것밖에 없더라고요.”
손상현 씨는 그의 아들이 죽지 않고 살아있는 것에 감사하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의지가 녹아있었다. “보통 저산소성 뇌손상이 오면 죽는 경우도 많아요. 우리 영준이가 살아있는 것은, 자기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진실을 알고 싶어서라고 생각해요. 우리 영준이가 왜 이렇게 됐는지, 진짜 진실을 밝히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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