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 화학물 유해성분 알고도
법망 빈틈으로 18년간 유통

96년 조사서 '유해성 없다'는 등
심사 소홀한 정부도 책임 커

특별법 제정 통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심리지원 병행돼야

 

  18일 국회 의원회관에서 ‘가습기 살균제 사건에 대한 2차 환경독성포럼’이 열렸다. 한국독성보건학회와 한국환경보건학회가 주최한 이번 포럼엔 백도명(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와 홍수종(울산의대 소아청소년과학과) 교수, 박태현(강원대 법학대학원) 교수, 이종현(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소장 등 의학·보건 전문가와 이호중 환경부 환경보건정책관이 참석했다. 해당 포럼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해 현재 이뤄진 실체 규명과 피해자 구제 대책의 방향을 살펴봤다.

 

▲ 19일, 국회 정론관에서 장하나 국회의원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와 가족모임, 환경보건시민센터 관계자 등이 기자회견을 열고 가습기 살균제 피해의 심각성을 알리고 있다. 사진 | 서동재 기자 awe@

 

  유해제품 생산한 기업과 정부의 용인
  가습기살균제 피해 사건은 생활용품 중 화학물질 사용에 의한 세계 최초의 대규모 인명 피해 사건이다. 1994년부터 판매된 가습기살균제 원료물질로 PGH(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 PHMG(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 등의 유해 화학물질이 사용돼 소비자들은 각종 질병에 노출된 것이다.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은 약 20년이 지난 2012년 1월에 이르러서야 국가와 살균제 제조·판매업체들을 상대로 첫 손해배상을 제기할 수 있었다. 폐 손상 질병이 가습기살균제의 해당 성분 때문이라는 질병관리본부의 조사와 발표가 2011년에 진행됐기 때문이다.

  화학물질 PHMG은 본래 카펫, 고무, 직물 등을 보존하기 위한 항균제 용도였다. 2012년 1월 질병관리본부에 제출된 한국화학연구원 부설 안전성평가연구소와 흡입독성시험연구센터의 보고서에서 PHMG, PGH에 장기 노출될 경우 폐섬유화 증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문제가 드러났다.

  하지만 가습기 살균제의 경우에는 법률상 안전관리대상 품목이 아니어서 아무런 규제 없이 제품이 시장에 출시될 수 있었다. 특히 해당 제품을 판매한 옥시레킷배킨저는 유해성을 알고서도 판매를 강행한 것으로 밝혀져 논란은 증폭됐다. 공정위는 2012년 8월, ‘인체에 안전한 성분을 사용했다’는 옥시의 광고에 대해 시정명령을 내리며 “PHMG 물질이 유해물질이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옥시가 화학물질을 거래할 때 원료에 대한 정보 등이 담겨있는 자료를 원료 공급자 등에게 제공받았던 사실이 근거로 제시됐다.

  전문가들은 정부가 유해성 심사를 소홀히 했기에 정부 역시 책임이 있다고 말한다. 실제로 환경부 산하 국립환경과학원은 1996년 가습기 살균제에 쓰인 PHMG에 대해 유독물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관보에 게시했다. 해당 문제가 밝혀진 이후 2014년에야 이를 유해물질로 규정했다. 이종현(EH R&C 환경보건안전연구소) 소장은 “PGH의 경우 유해성 심사자료에서 노출가능성이 분명히 명시돼 있는데 정부 화학물질등록평가팀은 추가적인 흡입독성자료 제출을 요구하지 않았다”며 “가능성이 있는데도 요구를 하지 않은 이후 피해가 발생하자 국립환경과학원 화학물질 등록평가팀은 이를 다시 번복하는 결과를 발표한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 조사는 빙산의 일각”
  정부는 2013년 7월 보건복지부 질병관리본부 주도로 가습기 살균제 피해에 대한 조사와 판정을 시작했다. 가습기 살균제 노출 기간과 강도, 임상전문가 진단, 영상판정, 조직병리 검사 등 4개 분야별 판정과 종합판정을 거치는 방식으로 조사를 진행한 것이다. 2015년 12월까지 정부 차원에서 집계된 피해자의 수는 1282명으로, 사망자는 225명이다.

  그렇지만 의학·보건 전문가들은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 규모와 정도가 정부의 발표를 훨씬 상회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현재 가습기살균제에 관련된 질환의 전체 규모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백도명 교수는 “현재 정부의 발표는 가습기살균제 사용 규모와 그에 따른 주관적 증상 호소에 따라 그 규모가 추정됐을 뿐”이라며 “환경보건시민센터의 자료와 법원에 제출된 자료 등에 따르면, 약 1100만 명이 가습기 살균제에 노출됐으며 30만 명 정도가 독성시험상의 무영향 수준 이상에 노출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해 폐질환 이외의 다른 질병도 유발됐을 가능성 역시 크다는 분석도 나온다. 가습기 살균제 조사·판정위원회 공동위원장인 홍수종 교수는 “물고기인 ‘Zebrafish’를 대상으로 가습기 살균제의 주요 성분인 PHMG와 PGH 독성실험을 한 결과 70분 내 죽었다”며 “이를 통해 폐 이외의 장기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나타났기에 비염, 동맥경화, 비만, 지방간 등을 포함한 다양한 질병과의 연관관계를 검토해야한다”고 말했다.

  조사·판정 시스템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과거 영상자료나 임상자료가 부족한 데다 이미 사망한 경우 가습기 살균제와 질병의 인과관계를 밝혀내기 어렵다는 것이다. 홍수종 교수는 “1차 조사는 일부 폐 손상 피해자가 누락되는 문제가 발생했고, 2차 조사는 폐 이외 질환자 등을 꼼꼼히 진단하지 못했다”며 “환경노출 조사 결과만으로도 피해를 인정하거나 최종 판정에서 의견이 갈릴 경우 더 높은 등급으로 판정하는 방법을 고민해야한다”고 말했다.

 

  여야 입장차로 폐기된 특별법
  정치권에서도 특별법 제정과 청문회 개최 등을 통해 진상규명과 피해자 지원에 나서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특별법이 제정되면 민·형사상 가습기살균제 피해에 대한 소멸시효 역시 해결할 수 있다.

  19대 국회에서 발의된 ‘가습기살균제 특별법’ 4개 법안의 내용으로는 가습기 살균제 피해조사·규명위원회 설치, 피해구제기금 설립 등이 있다. 하지만 환경노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새누리당은 수사결과를 바탕으로 대책을 구성하겠다는 입장을, 더불어민주당은 20대 국회 개원 전이라도 피해자 구체 대책을 만들어야한다는 입장 차이를 보였고 해당 법안은 19대 국회 회의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박태현 교수는 정부 스스로 당시 법의 미비점을 인정하고 가습기 살균제 특별법을 제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해당 제품이 10년 넘게 판매된 것에는 정부의 책임이 있기에 단순히 소비자-기업 간의 민사 문제로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해당 제품이 시장에서 판매된 데에 국가의 귀책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면 특별법 제정의 정당성은 더욱 강화된다”며 “정부 책임 규명과 제도적 정비 파악을 위해 특별조사위원회 역시 구성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피해자들이 현재 겪고 있는 사회적·정신적 어려움에 대한 검토와 관리, 심리지원 역시 이뤄져야한다고 말한다. 환경보건센터가 2015년 진행한 가습기살균제 피해 인정자 및 가족의 정신건강모니터링 결과에 따르면, 19명(43.2%)이 우울증 증세를, 10명(22.7%)이 불안 장애 증세를 보이는 등 심리적 문제를 보였다. 홍수종 교수는 “특수 재난에 해당하는 가습기살균제 사건의 초기 심리지원은 실패했다”며 “향후 정신스크러닝을 통한 개별 맞춤 심리지원과 의료 지원 및 사회적 지원을 결합해 심신회복과 사회 복귀를 위한 통합서비스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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