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서경(왼쪽), 김운성(오른쪽) 조각가 부부가 평화의 소녀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 박윤상 기자 prize@

2015년 12월 28일 한일 ‘위안부’ 협상 쟁점은 일본 대사관 앞에 세워진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이었다.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은 단순히 일본 제국주의의 잔혹성을 보여주고자 제작된 것이 아니다. 이는 국적과 인종을 넘어 전쟁에 희생된 모든 이들의 넋을 기리고, 전쟁 범죄의 반복을 방지하는 중요한 기억의 표상이다. 이러한 상징성을 지닌 ‘위안부’ 평화의 소녀상을 만든 김서경 김운성 부부 작가를 만나봤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중앙대학교 조소학과 동기로, 대학 재학시절부터 함께 작품을 제작하고 전시했다. 특히 마음이 잘 맞았던 부분은 사회 문제를 조각으로 표현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대학 졸업 후 3년간 미술학원을 운영했지만 교육 제도에 대한 한계를 느껴, 예술로 문제의식을 표현하는 ‘활동가’가 되었다.

부부 작가의 작품으론 2002년 미군 장갑차에 치여 숨진 여중생 신효순, 심미선 추모 조형물 등이 있지만, 가장 널리 알려진 건 ‘평화의 소녀상’이다. 그들은 수요집회와 ‘위안부’할머니들의 역사를 알리기 위해 소녀상을 제작한다고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그들은 한일 협상 결과에 대해 실망감을 느꼈다. 한일 간의 ‘공식 문서’ 없이 진행된 협상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표현에 있어서도 불쾌했다고 했다. “당시 한국 정부가 ‘배상금’이라고 발표한 반면, 일본 정부 측에서는 ‘거출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어요. ‘거출금’이라는 단어는 일본에서 난민을 도와줄 때 쓰는 말이에요. 우리는 국제법에 따른 법적 배상금을 받아야 합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구별하고, 기억하는 것이 역사적 실수를 막는 시발점입니다.”

그러나 소녀상 제작은 참담한 협상 이후에 큰 변화를 맞이했다. 일본 정부가 소녀상 철거를 요구하는 만큼, 국민도 '위안부' 역사와 협상의 내용에 뜨거운 관심을 보였다. 그 관심은 더 많은 평화의 소녀상 주문제작으로 이어졌고, 국내외 할 것 없이 시민단체와 지자체의 요청은 끊이지 않았다.

김서경 작가는 소녀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시민들의 변화가 눈에 보일 때, 가장 뿌듯하다고 했다. “소녀상을 만들게 된 계기도 한 시민 때문이었어요. 할아버지 한 분이 수요 집회를 굉장히 반대하셨어요. 그게 인연이 되어 할아버지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과 활동가분들의 이야기를 들려드렸죠. 그리고 할아버지는 변하셨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수요 집회에 동참하셨어요. 그 분께서 저희에게 ‘1000번째 수요 집회인 2011년 12월 24일에 비석을 세우자, 그래서 할머님들의 노고를 기리자’고 말씀해주셨어요. 이것이 소녀상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랍니다.”

김서경, 김운성 작가는 '위안부' 소녀상 외에도 '베트남 피에타 상'을 제작하고 있다. 지난 4월 28일, ‘베트남 종전 41주년, 한-베 평화재단 발족 기자회견’에서 ‘베트남 피에타 상’은 처음으로 공개됐다. 피에타상은 베트남 전쟁 때 한국 군인이 베트남 민간인에게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한 사죄를 위해 만들어졌다.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선 우리가 저지른 잘못부터 제대로 인정하고, 진정한 사과를 해야 돼요. 다른 곳에서도 전쟁 범죄를 일으킨 우리가 피해자의 입장만을 고수한다면, ‘위안부’를 알리려는 한국의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 있기 때문이죠. 청년들이 이런 마음가짐을 선행한 뒤에, ‘위안부’ 문제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겠어요. 그렇지 않으면 ‘문제 제기’ 가 아닌, ‘감정’만 남게 됩니다.”

 

글 | 최다은 독자기자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