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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사유의 힘으로 피로사회에 저항하다
[기고] 사유의 힘으로 피로사회에 저항하다
  • 고대신문
  • 승인 2016.11.07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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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과주의로 인간성 자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저항해야 할까. 사진 | 김주성 기자 peter@

  요즈음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우리 사회가 피로사회라는 점을 절감한다. 유치원부터 시작된 경쟁은 끝이 없다. 대학교 들어가기 위한 피나는 노력 끝에도 다시 취업이 기다리고 있으며 취직이 되어도 끝은 아니다. 취직도 어렵거니와 일자리도 비정규직이 많다. 또한 취직되어도 끊임없는 자기 업데이트가 강요되고 있다.

  우리가 70, 80년대의 대량공채와 평생고용제를 돌이켜 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 피로사회이고 소진사회라는 점을 절감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렇게 ‘헬조선’이라는 말이 가슴 깊숙이 와 닿는데, 젊은이들은 저항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우선 ‘왜 그럴까?’ 하는 질문에 대답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병철 교수의 진단에 의하면 부정성의 상실과 긍정성의 과잉 덕이라고 한다. 이전에는 계급착취를 말했다. 독재 권력이 우리를 억압하고 자본가들이 우리를 착취한다고 저항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착취하는 것이 자본가 계급 같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이라는 것이 한 교수의 생각이다. 독재정권 시절에는 우리 사회가 규율사회였으나 이제는 신자유주의적인 성과사회이다. 당시의 권력은 억압적이고 규율을 강요했었으나 이제 신자유주의 권력은 점차 탈규제를 주장하고 무한정한 ‘할 수 있음’을 역설하고 ‘예스 위 캔’을 선전한다. 우리나라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정부에서 신자유주의적 성과사회로 변모하였다. 이전 규율사회의 금지, 명령, 법률의 자리를 이제는 프로젝트, 이니셔티브, 모티베이션이 대신한다. 여기서는 누구나 더 많은 성과와 성공을 위해서 경주할 뿐이다.

  신자유주의의 무서운 점은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이다. 우리가 끊임없이 착취를 당하면서도 우리는 자기 행복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믿는다. 흔히 우리는 ‘나는 자유롭게 나의 행복을 추구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추동력이다. 독재적인 규율권력이 폭력을 행사했던 것은 다만 그 권력이 잘 작동하지 못함을 보여줄 뿐이다. 더 효율적인 권력은 그 속에 사는 개인들이 권력이 원하는 바를 그 스스로 원하게 만든다. 여기서 개인은 자유롭다. 그러나 어떤 범위 안에서 그렇다. 그 범위는 효율성과 성과이다. 푸코의 분석에 따르자면 이것이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의 놀라운 전략이다. 신자유주의의 탈규제는 인도주의적 발상이 아니라 자본주의 발달 단계와 관계되어 있다. 왜냐하면 생산력이 일정 수준 이상 오르면 더 이상 규율로는 되지 않고 자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성과에의 열망’이 도사리고 있다. 자기 착취는 타자에 의한 착취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고 능률적으로 된다. 왜냐하면 자기 착취가 자유의 감정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교수의 말처럼 “개인적 자유의 이념 위에 세워진 ‘자유 경쟁’은 ‘자본의 자기 관계, 즉 자본이 다른 자본과 맺는 관계이며, 자본이 자본으로서 취하는 실제적 태도’일 뿐이다. 개인의 자유를 통해 실현되는 것은 자본의 자유다.” 이러한 성과사회에서 대다수는 자기 자신만을 자본으로 가진 기업인 노동자이다. 이것은 심지어 CEO라고 할지라도 많이 다르지 않다. 그 때문에 누구에게나 끊임없는 자기 업그레이드가 필요하다. 물론 성과사회의 무한 경쟁은 늘 낙오자를 낳게 마련이고 과도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이러한 무한 경쟁은 공격성을 유발하지만, 신자유주의 하에서는 적대적 타자가 소실되었기 때문에, 공격성이 외부로 탈출구를 찾지 못하고 자신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래서 혁명가가 되지 못하고 우울증 환자가 된다. 내가 경쟁에서 패한 것은 전적으로 나의 탓이다. 내 노력이 부족했거나 나의 자질 부족 탓이다. 나는 부끄러워해야 하고 더욱 분발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약자의 자기변명에 불과하다.
권력이라고 하면 우리는 흔히 독재 권력처럼 억압과 금지를 연상한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 권력의 특징은 억압적이지 않고 생산적이라는 점이다. 교육과 사회생활 모두는 우리를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형성시킨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호모 에코노미쿠스(경제적 인간)가 되었다. 이 점이 무섭다. 신자유주의는 쾌락을 허용하고 장려한다. 누구나 야망을 가질 수 있으며 노력할 수 있다. 누구 눈치를 볼 필요도 없고, 전혀 도덕적 부담감을 느낄 필요가 없다. 이 전에는 회사에서는 그렇더라도 질적으로 다른 기관들이 존재했었다. 예를 들어 가정도 그렇고 학교도 그렇다. 그러나 이제는 달라졌다. 부모는 자녀라는 인적 자원에 투자를 하는 존재이다. 운이 좋다면 자녀가 출세하고 이것은 부모에게 만족감이라는 심리적 보상을 제공한다. 그 때문에 공부 잘 하고 성공한 자녀에게는 모든 것이 용서된다. 반면에 소위 못난 자녀를 둔 부모는 남 보기에 부끄럽다. 또한 대학 본부만 하더라도 효율성과 경영 마인드로 무장된 공대와 상대 교수들이 목소리를 높이며 대학 총장은 CEO가 된 지 오래다. 진리 추구나 자아 형성이나 비판 정신은 더 이상 대학의 주도 이념이 아니다. 대학과 교수들을 움직이는 것은 성과이고 학생은 취업과 성공에 의해 움직인다. 이렇게 사회 전체가 하나의 가치 체계 아래에 개인들과 함께 편입되었다. 이것은 효율성과 경제적 이득이다. 그러나 이러한 호모 에코노미쿠스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결국 신자유주의의 통치 전략이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호모 에코노미쿠스일 경우에만 통치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욕망을 가지고 있으며 욕망은 신자유주의 통치의 대상이다. 신자유주의는 욕망의 추구를 부추긴다. 그러나 개인의 욕망 추구를 전체의 이익에 적합하도록 조절한다. 개별적 호모 에코노미쿠스들은 자기도 모르게 최대 생산과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으로 이끌린다. 이 때문에 저항은 불가능해진다.

  물론 현 시대에도 저항의 상징으로 촛불이 있다. 그러나 혁명을 외치던 70, 80년대의 저항은 아니다. 어쩌면 시대가 달라졌을 것이다. 촛불의 가능성은 현재 진행형이어서 어디로 갈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렇다면 ‘헬조선’에서 각기 원자적으로 흩어져서 자기 성공을 추구하면서 통치되어야만 할 것인가? 필자는 여기서 저항의 하나의 가능성으로 철학을 제안하고 싶다. 여기서 철학이란 철학과의 철학이 아니라, 주류 조류를 거절할 수 있는 사유의 힘이다. 새로운 것을 생산해야만 할 대학과 언론은 이미 알고 있고 이미 통용되고 있는 것들만 지루하게 반복한다. 그러나 사유는 다르게 생각하기이고 이것이 저항의 시작이다. 우리는 사유의 힘을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담론을 해체하여야 한다. 철학의 하나의 예로서 용수가 쓴 <중론>에서 보이는 상호적 의존성의 세계를 통해서 신자유주의의 세계를 해체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서구적 사유는 타자보다 나를 그리고 대상보다 주체를 우위에 둔다. 그래서 눈과 같은 감각 주체나 이성 같은 사유 주체가 있기 때문에 대상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용수는 보는 주체, 욕망 추구의 주체는 또한 그의 대상에 의존되어 있다고 현재의 사고방식을 해체한다. 그는 우선 눈이 대상을 보지만 자기 자신은 못 본다는 점을 지적한다. 서구 주장처럼 눈이 대상을 보는 능력이 있어서 비로소 세계의 존재가 보이고 그래서 그 존재가 우리에게 인정된다. 그러나 몸으로서의 눈이 아니라, ‘보는 능력으로서의 눈’은 스스로를 볼 수 없다. 그러므로 눈의 존재는 인정될 수 없다. 그렇다면 눈은 대상이 보이기 시작할 때 그리고 대상을 보는 순간에만 보는 능력으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대상이 없으면 눈도 없다. 또한 보는 눈이 인정될 수 없다면 보는 사람도 역시 인정될 수 없다. 보는 주체나 욕망 추구의 주체는 대상에 의존된다. 역으로 대상도 ―먼저 말했듯이― 주체에 의존되어 있다. 이렇게 나는 타자에 의존되어 있고 타자는 나에 의존되어 있다. 욕망 추구의 원자적 존재는 그 자체로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그 안에서 살고 있는 세계가 존재하고 우리가 함께 하는 타자가 존재할 때에라야 나는 존재한다. 신자유주의의 호모 에코노미쿠스로 부지런히 달려가는 대신에 멈춰 서서 다르게 생각하다보면 호모 에코노미쿠스와는 다른 존재가 되지 않을까? 이러한 다른 존재들이 생겨나고 모이기 시작하면 신자유주의는 그 내부에서부터 해체되지 않을까? 저항은 해체에서 시작한다.

 

글 | 주광순 부산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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