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TV에선 모녀가 마주 앉아 놓고 서로 뺨을 후려치게 하는 종교의식 장면이 흘러나왔다. 타작마당이라나. 소름 끼치는 광경을 보고 있자니 사회부 기자로 첫발을 디뎠을 때가 떠올랐다. 한 학기 간 풀어낼 아이템 리스트에 사이비 종교를 올려놓고 동시에 이단(異端)으로 흔히 언급되는 집단에 발을 들였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전도하는지, 집단에서 이탈할 시 어떻게 대응하는지 등을 알아냈지만, 기사화하진 못했다.

  상담사로, 때론 교수로 변신을 거듭하는 그들에게 사기죄를 묻긴 어려웠다. 사기죄는 재산상의 피해를 입혔다는 구성 요건을 갖춰야만 성립돼서다. 속여서 알아낸 개인정보를 ‘전도’에 사용하려는 이들은 이미 ‘포교의 자유’라는 든든한 방패도 준비했다. 이후 그 개인정보는 이탈한 신도를 직접방문 하는 데 사용됐다. 한 여학생은 지속적으로 집 앞, 강의실 주변을 서성이던 그들에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며 흐느꼈다. 스토킹은 끝났어도, 트라우마는 여전한 듯 했다. 다 보고서도 ‘종교의 자유’로 단단히 무장한 그 성역을 깰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녀를 포기했다.

  물론 언론이 나서서 종교의 모든 옳고 그름을 일일이 따질 순 없다. 이는 초월적이며 비가시적인 절대자에게 기댄 종교를 마주해야하는 언론의 한계다. 동시에 헌법이 수호하려는 ‘신앙’의 자유를 해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책임이기도 하다. 문제는 종교에 대한 이성적인 비판을 너무도 쉽게 포기할 때 생긴다. 종교가 성역화 된 사회는 위험하다. 종교를 위한 ‘종교의 자유’가 아닌, 종교의 자유를 누리기 위한 ‘종교’가 생겨난다. 그 과정에서 실제로 헌정 질서와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폐단이 불쑥불쑥 솟아올라오지만, 이는 서로 다른 종교 매체 간 물고 뜯는 모양새로만 전달될 뿐이다. 그런 싸움이야말로 ‘종교의 자유’로 설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종교에겐 더할 나위 없이 안전한 보호막이다.

  최근 포털 뉴스에 며칠 동안 조계종 기사가 떴다. 설정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이 ‘숨겨진 딸’ 논란으로 사퇴했다며 차기 경쟁 구도를 다룬 기사들뿐이다. 언론에선 그 이상으로 깊이 접근하지는 않는다. 괜히 덤볐다가 본전도 못 찾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언론은 ‘목격해도’ 외면한다. 결국 보도로 견제해야 하는 상황에서 제 기능을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종교’라는 실체를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인 만큼 그들을 향한 시선을 결코 거두지 않아야 한다. 그래 그 정도는 사실 하려면,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녀를 보러 다시 가야겠다.

 

박규리 사회부장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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