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월 안희정 사건에 무죄판결이 난 후 사법부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한 구성원의 삶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형벌이 부과되는 사법법(司法法)인 형법. 그만큼 신중한 법 해석이 우선돼야 한다는 입장인 형법학계에서도 서서히 변화의 움직임이 나타나고 있다.

 

최소한의 자유, 성적 자기결정권

  형법 제2편 제32장 <강간과 추행의 죄>는 제297조 강간죄, 제297조2 유사강간죄, 제298조 강제 추행죄, 제303조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죄 등으로 구성된다. 현행 형법상 간음은 쌍방 남성과 여성의 각 성기 사이의 결합을 뜻하며, 동성 간의 강간은 유사강간, 강제추행에 해당한다.

  1953년 제정된 형법에선 제32장의 제목이 ‘정조에 관한 죄’였지만 1995년 개정을 통해 ‘강간과 추행의 죄’로 바뀌었다. 2012년에는 강간죄의 객체를 ‘부녀’에서 ‘사람’으로 개정했다. 하태훈(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개정으로 강간죄의 보호법익이 ‘여성의 정조 또는 순결’이 아닌 독립된 개인으로서 행사할 수 있는 ‘성적 자기결정권’으로 바뀌었다”며 “형법도 사회 일반의 보편적 인식과 법 감정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성적 자기결정권은 성적 행동에 있어서 신체 안전과 의사결정 자유를 온전히 보호받을 권리다. 대부분의 판례에서 성적 자기결정권은 자신이 원하지 않을 때 타인과의 성관계를 강요받지 않을 소극적 자유로 해석된다.

  법관은 증거와 진술, 각 당사자의 정황 등 객관적인 외부 요인을 토대로 성적 자기결정권 침해 여부를 판단한다. 특히 피해자와 피고인의 행위 전후의 정황이 크게 고려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유근 연구원은 “안희정 사건의 경우 피해자의 행동 전후에 대한 판단이 ‘피해자다움’을 요구한 것이라며 비판받았지만 사실 불가피한 과정”이라며 “피해자의 행동 전후를 판단하지 않을 시 피해자의 정신과 치료나 자살시도 등 가해자의 유죄 판결에 유리한 정황도 반영되지 않아 오히려 불합리하다”고 말했다.

  양 당사자의 진술이 동일한 정도로 일관된 경우 형사소송법상의 기본원칙에 따라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명문의 형벌 법규를 피고인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확장해석하거나 유추해 해석하는 것은 죄형법정주의 원칙에 어긋나서다. 김유근 연구원은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를 많이 배려해야 하는 것이지 피해자에게 이익이 되도록 판결하는 것이 아니다”라며 “무죄판결은 ‘죄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유죄가 입증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최협의설 따르는 폭행 및 협박 인정 범위

  범죄행위로 규정된 모든 성행위는 ‘비동의’ 성행위이며, 비동의가 초래된 과정에 따라 죄명이 결정된다. 즉, 비동의 의사를 표시하는 과정에서 폭행 또는 협박이 존재했다면 강간죄가 성립되며, 업무 상 위계나 위력이 행사됐다면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이 된다. ‘위력’이란 사람의 의사를 제압할 수 있는 일체의 세력으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지위도 이에 해당한다.

  폭행 또는 협박을 해석하는 학설은 인정 범위에 따라 최광의, 광의, 협의, 최협의로 나뉜다. 현재 대법원은 최협의설에 따라 폭행과 협박을 피해자의 반항을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하는 정도로 엄격히 해석하고 있다. 강간죄가 3년 이상에서 50년 이하의 징역으로 중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어 보다 객관적인 법 적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김유근 연구원은 “광의설을 적용할 경우 피해자가 합리적인 저항이나 진지한 거부의사만을 표현하는 경우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서의 폭행·협박으로 본다”며 “이 경우 합리성이나 진지함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모호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불가능하게 하거나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였는지는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 행사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성교 당시와 이후의 정황 등을 종합하여 판단한다. 위력 행사 여부도 다양한 요소를 고려해 판단한다. 행사된 유형력의 내용과 정도, 행위자의 지위나 권세의 종류, 피해자의 연령, 행위자와 피해자의 이전부터의 관계, 범행 당시의 정황 등을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안희정 전 지사의 사건을 맡은 재판부도 사건 전후의 정황이 간음을 위한 위력이 행사됐다는 인과관계를 보이기엔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판례 최협의설 완화하는 추세

  강간죄가 성립되려면 간음 이전의 폭행·협박, 위력과 같은 유형력이 간음을 목적으로 행사됐다는 인과관계까지 입증돼야 한다. 간음 행위가 꼭 폭행 또는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확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피해자의 저항이나 반항 행위가 인과관계를 입증하는 핵심 역할을 한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반항이 현저히 불가능할 수위의 폭행·협박만을 강간죄 구성요건으로 인정하면서, 피해자의 저항행위를 통해 인과관계를 확인하는 것이 모순적”이라고 지적한다. 2017 한국성폭력상담소 통계에 의하면 한국성폭력상담소에 접수된 성인 강간 피해 사건 중 ‘최협의설’에 따른 강간죄 구성요건을 충족한 경우는 12.2%에 불과했다. 이 중 43.5%는 울면서 성교를 거부하거나 거절 의사만 표시해 강간죄로 인정받지 못했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김정연 연구원은 “반항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반항해야 강간죄가 인정되는 상황”이라며 “비동의 간음죄의 필요성도 피해자의 경험과 판례가 채택한 사실 간의 괴리로 인해 강조됐다”고 말했다.

  과거 판례 중 성폭력 피해 당시 공포심으로 인해 비명을 질렀지만 신체적인 저항을 못한 사안, 수치심으로 인해 구조요청을 하지 못한 사안, 피해자가 성교를 거부하는 행동을 하였으나 탈출하거나 구조를 요청하지 않은 사안 등은 ‘폭행·협박’이 있었음이 인정되지 않았다. 하태훈(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보복이나 불이익 때문에 애초에 저항을 포기하는 피해자들을 외면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강간죄의 폭행 협박에 대한 판례에선 최협의 폭행 및 협박의 정도를 충족하는 입증 기준을 완화하는 경향도 나타난다. “피해자가 사력을 다해 반항하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 가해자의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현저히 곤란하게 할 정도에 이르지 않았다고 섣불리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대법원2005.7.28. 선고판결도 이에 해당한다.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박윤석 부장검사는 “2005년 대법원 판결을 기점으로 피해자의 저항행위가 제압되는 상황에 대해 종합적으로 판단하기 시작했다”며 “판단기준을 합리적인 관점으로 변경해서 사실상 최협의설을 완화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글 | 김예진 기자 sier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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