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학교는 우리나라 최초의 민족 사학으로서 국가를 위한 인재들을 배출해냈다. 그 바탕에는 학생들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힘쓴 큰 스승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개교 114년을 맞이해 조지훈 선생, 김상협 전 총장, 김준엽 전 총장에 대해 다시금 알아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추진력과 실천력으로 민족학을 개척한 따스한 시인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승무의 작가로 유명한 조지훈 선생은 본교에 시인과 학자, 교육자, 학교 상징의 제작자로서 여러 큰 족적을 남겼다. 민족이라는 개념에 실질적으로 다가간 그와 민족고대는 떼려야 뗄 수 없던 관계였다.

  경북 영양에서 태어난 조지훈 선생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한의학자였던 아버지 조헌영의 영향 아래 어려서부터 좋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감수성이 특출나기로 유명했으며 16세 때 정식회원은 아니었지만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며 어학과 민족문화 등 다양한 방면의 관심을 키웠다. 시를 썼던 형의 영향을 받으며 외국의 시에도 두루두루 관심을 기울인 조지훈 선생은상경한 뒤 혜화전문대학에서 공부했다.

  시인 조지훈은 그 당시에도 문학계, 특히 시 분야에서 주류에 속했다. 동양의 고전적이고 불교적인 시풍을 가졌던 그는 한국 시의 정신사적인 계보를 만들려는 노력도 기울였다. 조지훈 선생은 자연을 바탕으로 인간의 염원과 가치를 성취하기 위한 주제로 시를 쓰며 박두진, 박목월과 함께 ‘청록파’를 이뤘다.

  조지훈 선생이 교수로 부임한 시기는 그의 나이 20대 후반일 때로 그 일화가 흥미롭다. 당시 한 술집에 있던 본교 문과대 학장이 친구들과 열띠게 토론하는 옆자리의 젊은이가 너무 박학다식하고 논리적이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그 청년이 바로 시인 조지훈이었고, 문과대 학장이 교수들에게 그를 본교 교수로 부임하도록 설득해달라고 요청해 결국 20대 후반의 나이에 본교 국문과 교수로서 고려대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후 학생과 술을 사랑했던 조지훈 선생은 학생들과 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민족을 노래했다.

  조지훈 선생은 실천력이 대단했던 문학가였는데, 이러한 특성이 뛰어난 학자로서의 조지훈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조지훈 선생은 예로부터 통일 이후를 바라보며 ‘민족’을 강조했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 기존의 한국고전국역위원회를 확대 개편해 만들어진 본교 민족문화연구소의 초대 소장을 맡았다. 엄청난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민족문화연구소는 의복, 생활양식 등 우리민족의 하나부터 열까지를 정리해냈다.

  김종훈(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민족문화연구소가 정리한 자료는 우리나라 민족에 대한 연구에서 항상 중요한 참고자료로 언급된다”며 “한국학을 새롭게 개척한 조지훈 교수는 엄청난 실천력의 소유자”라고 말했다.

  1960년대 건강이 악화됐던 조지훈 선생은 특이한 수업 방식을 사용했다. 본인의 수업에 잘 나오지 않았다고 전해지는데, 이미 그는 큰 스승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학생들은 과제를 수행하며 만족했고 존경심을 가졌을 뿐 별다른 불만을 품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조지훈 선생은 몇몇 학생에게 학술서적 전체를 번역해오는 등의 큼지막한 일을 과제로 내줬는데, 이를 출판사와 연결해 학생의 이름으로 책을 펴냈다. 그리고 그 서적을 총장에게 직접 가져가 본교에서 강의할 자리를 주는 게 어떻겠냐고 건의하기도 했다. 이렇게 학생들을 믿고 지원하며 후학양성과 학생들의 미래를 위한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성탄제’로 유명한 시인인 김종길(문과대 영어영문학과) 명예교수는 “50년대에 조지훈은 고려대가 필요했고 고려대는 조지훈이 필요했다”며 “웬만한 고려대의 문구는 다 조지훈에게 부탁했다”는 말을 남겼다. 조지훈 선생은 교가를 작사했을 뿐 아니라, 호상비문을 작성하는 등 본교의 상징적인 문구와 글귀를 남겼다. 이에 본교 국어국문학과는 설립 60주년을 기념하며 조지훈 선생의 업적을 기려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민족문화 전 영역을 바라보며 다양한 방면의 융합을 이뤄낸 점과 본인의 발걸음이 길이 되게 했던 조지훈 선생의 추진력과 실천력은 2019년의 현대인에게도 다양한 가르침을 제시하고 있다. 

 

  부당한 정권에 맞섰던 지성과 야성의 선구자

  ‘지성과 야성’. 고려대의 정신은 지금까지도 중요시되는 가치다. 이를 가장 열렬히 내세웠던 사람이 바로 김상협 전 총장이다. 지성과 야성의 조화를 강조하며 학생들이 새로운 차원의 지도자가 되길 원했던 김상협 전 총장은 군사독재 시절에 학교의 고려대의 정신을 지켜냈다. 1920년 전라북도 부안에서 태어난 김 전 총장은 국민학교 시절부터 진지하고 과묵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학교를 다니는 동안 거의 전 과목 만점을 받을 정도로 학업에 두각을 나타냈다. 아버지인 경성방직 김연수 사장의 사업이 성공한 상황 속 지원을 받아 1944년 도쿄제국대학 정치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다른 학교에 비해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던 도쿄제국대학에서 그는 정치학 지식의 기반을 다졌다.

  김 전 총장은 광복 직후인 1946년 본교정법대학 정치학과 교수로 부임하게 됐는데, 만 26세의 젊은 나이에 정치학의 불모지인 우리나라에서 학문의 새로운 출발을 이뤄냈다. <큰 스승 김상협>이라는 책을 통해 엄상익 변호사는 “김상협 전 총장은 명강의로 소문이 났었다”며 “좌익의 흐름이 사회 저변을 장악한 그 시절 다양한 시점을 제안하는 그의 주장은 파격적이었다”고 말했다.

  1956년부터 1960년까지 사무처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상협 전 총장은 1962년 문교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하지만 혁명 실세들이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 민간인 출신 장관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학육성법’ 등을 추진하며 본인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다. 김 전 총장은 1963년 박정희 정권이 출범 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오늘날의 학생기풍은 국가 장래를 위해 극히 염려스러운 부분을 갖고 있다”며 “학교가 범법학생들에 대한 조치를 게을리 할 경우 학교 책임자에 대한 정부의 감독을 강조할 것”이라고 말하자 언론을 통해 정부를 비판했다. 결국 정치교수로 지목돼 학교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많은 풍파를 겪고 난 이후 김상협은 1970년 본교 총장으로 취임했다. 김 전 총장은 취임식에서 독재정권의 획일주의에 대한 우회적 저항 선언을 했다. 또한, 지성과 야성의 조화라는 새 시대 지도자의 인간상을 말하는 그의 취임사는 학생들에게 큰 자극을 줬다. 엄상익 변호사는 “이제 막 20대 청년기에 들어선 신입생들에게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새로운 충격이었다”며 “그들은 마치 김상협 교주의 열렬한 신도가 되는 듯 했다”고 회상했다.

  혼란스러운 정치상황 속에서도 김 전 총장은 대학 발전에 최선을 다했다. 의대가 없었던 터라 우석대 의대를 인수하려는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보사부가 본교의 반정부 시위와 김상협 전 총장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어 완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김 전 총장이 문교부의 민관식 장관에게 대통령을 설득해달라고 부탁했고 결국 우석대 의대를 인수할 수 있었다.

  1975년 박정희 정권이 긴급조치 7호를 선포하고 민주화 시위 진압을 명목으로 휴교령을 내리자 김 전 총장은 자신이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책임을 지고 총장직을 사임했다. 이때 “우리 땅에도 긴장과 편중과 통제의 차가운 삭풍이 지나가고 훈훈한 봄바람이 찾아올 수 있을지 답답하기만 하다”며 “자유 정의 진리의 정해진 방향으로 일보일보 꾸준히 접근해나가는 역사의 진행과정을 굳게 믿고 정진해달라”고 학생들에게 당부했다. 2년 후인 1977년 다시 본교에 복귀해 1982년까지 총장을 지냈는데 이후 국무총리에 임명이 돼 관직에도 몸을 담았다. 그 후로도 김 전 총장은 본교의 명예총장 직무를 맡아 수행하며 대한적십자사 총재를 지내기도 했다.

  군사정권의 압박에 맞서며 학교를 위해 힘썼던 김상협 전 총장은 1900년대 중후반의 고려대를 지지했던 버팀목이었다.

 

  학생을 자신보다 우선했던 큰 스승이자 큰 거지

  김준엽 전 총장은 ‘고려대 총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조금 더 나아가 ‘대학 총장’ 중에서도 상징적인 인물이다. 김준엽 전 총장은 독립운동가, 학자, 교육자 등 여러 가지 타이틀로 기억된다. 그중에서도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고려대학교의 큰 스승’일 것이다.

  1920년 평안북도 강계군에서 태어난 김전 총장은 독립운동의 근거지가 됐던 만주와 가까운 거리에 있어 유년기부터 독립운동을 자주 접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1940년 일본 게이오대학에 입학해 동양사학과에서 공부했는데, 이때 일본의 학도병으로 중국에 가게 된다. 그는 목숨을 걸고 학도병을 탈출해 수천 리를 걸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찾아가고, 그곳에서 특수훈련을 받으며 독립운동가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해방 직후인 1949년 김 전 총장은 본교사학과의 교수로 부임했다. 학문 연구를 이어나가다 1957년 아세아문제연구소(아연)를 세워 중국과 공산주의에 대한 깊은 연구를 진행했다. 김 전 총장은 20여 년간 아연을 발전시키는 데 심혈을 기울여 이를 세계적인 수준의 연구소로 만들었다. 임희섭(문과대 사회학과) 명예교수는 ‘김준엽 선생 1주년 추모 문집’을 통해 “이미 서구의 인문사회과학자들 사이에서 고려대는 몰라도 아연은 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며 뛰어난 학자로서의 김 전 총장을 회상했다.

  1982년 김상협 전 총장의 뒤를 이어 총장에 부임한 김준엽 전 총장은 본교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다. 정신적인 면뿐 아니라 녹지캠퍼스를 구축하는 등 교내 공간시설에까지 세세한 신경을 썼다. 1983년까지의 본교 총면적은 4만 8000평이었는데, 그 절반에 해당하는 2만 3000여 평에 건물을 새로 세울 정도였다.

  김준엽 전 총장은 ‘작은거지’와 ‘큰거지’라는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고 한다. 아연 소장 시절엔 ‘작은 거지’로서 외국에서연구기금을 얻어왔다면 총장 때는 ‘큰 거지’로서 오로지 본교 발전을 위해 기업으로부터 최대한 많은 후원금을 얻겠다는 의미였다.

  그가 단순한 총장을 넘어 스승으로서 학생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굉장했다는 것은 여러 일화들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본교생 수백 명이 학생회관에서 농성 시위를 했을 때 학생회관 밖에서 대기 중인 구급차와 함께 학생들과 같이 밤을 샌 일화 등이 전해지지만, 가장 유명한 것은 1980년 대 총학생회 부활 시점의 일이다.

  1984년 당시 고대생들은 군사정부가 학생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강제로 조직했던 학도호국단을 폐지하고 총학생회를 인정하라는 요구조건을 내걸고 시위를 벌였다. 여러 대학의 학생들이 연합해 관훈동민정당사에 진입해 농성을 벌였고, 학생들은 경찰에 연행됐다. 당시 정부는 시청 앞 호텔에서 대학 총장들을 모아 해당 학생들을 제적 처분하라고 전했다. 그러자 김준엽 전 총장은 격분해 “제적은 학생들에게 사형선고나 마찬가지”라며 “학생들을 사형 집행하라고 난리치는데 여러분은 지금 밥이 목에 넘어갑니까?”라고 소리쳤다.

  결국 고려대에는 총학생회가 부활했고, 김 전 총장은 정부의 압박을 받게 됐다. 이후 문교부는 교직원 자녀 특별입학을 문제로 25명 교직원 자제들의 제적처분 또는 총장의 사퇴를 강요했다. 김 전 총장은 교직원 자제들의 복학을 조건으로 본인의 총장직을 사퇴했다.

  임희섭 명예교수는 “김 선생님은 자신의 총장직보다 학생들을 복학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셨다”며 “많은 교직원과 학생들이 반대했지만 선생님의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김 전 총장이 진행한 마지막 행사인 졸업식에서 아침부터 학생들이 ‘총장사퇴 결사반대’와 ‘김준엽 총장 만세’를 외치며 총장의 의지를 돌리려 애썼다는 점을 보면 학생들에게 김 전 총장이 어떤 의미였는지 알 수 있다.

  이후 정권교체 시기마다 수많은 국무총리직과 입각 제의를 받았지만 “민주주의를 외치다 투옥된 학생들이 아직도 감옥에 있는데 스승이라는 자가 총리가 될 수 없다”며 “지식인들이 벼슬이라면 굽실거리는 풍토를 고치기 위해 나 하나만이라도 그렇지 않다는 증명을 보여야 한다”고 모두 거절했던 김준엽 전 총장은 영원히 고대인들의 큰 스승으로 기억되고 있다.

 

권병유 기자 uniform@

사진제공 | 고려대학교 박물관

저작권자 © 고대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