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실렌티 체이홉 카시코시 코시코 칼마시 케시케시 고려대학!” 응원OT, 입실렌티, 고연전 등 각종 행사에서 외치는 고려대 교호다. 분위기에 취해 목청이 터져라 교호를 외치다가도 그 의미를 몰라 멈칫하게 된다. 사실 교호에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 1923년 경 보성전문학교 백상규 교수가 19세기 활약한 사상가, 독립운동가, 작가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이제 그 의미를 찾아가보자.

독립의 불씨를 뜨겁게 지핀 입실란티

입실란티스혹은 입실란티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알렉산더 입셀란테스(A lexa nderYpsilantis, 입셀란테스)는 그리스 독립운동지도자로 활약한 인물이다. 1792년 이스탄불에서 태어난 뒤 가족들과 함께 러시아로 망명했다. 이후 러시아 군대의 장교가 된 그는 나폴레옹 전쟁에서 공을 세워 육군소장으로 승진했다. 1453년부터 오스만투르크의 그리스 지배가 장기간 지속됨에 따라 그리스 내부에선 독립의 열망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에 18204월 창설된 당대 그리스비밀 애국독립단체인 헤타이리아 필리케는 외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운동을 하고자 했다. 그 결과로 러시아에서 활약한 입셀란테스가 최고지도자로 추대되면서 발칸 반도에 위치한 여러 민족의 지지 아래 봉기를 일으켰다. 하지만 러시아가 지원해줄 것이라는 기대와 달리, 러시아는 지원 요청을 거절했다. 또 입셀란테스를 군적(軍籍)에서 제외시키고 오스만제국에 협조적인 태도를 취하기에 이른다. 결국 드라가샤니 전투에서 패배한 그는 오스트리아로 달아났고, 그곳에서 검거됐다. 입셀란테스가 주도한 이 봉기는 실패했지만, 훗날 그리스 독립전쟁의 불씨가 됐다.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에게 입셀란테스는 무엇을 상징했을까. 그가 살던 시대 그리스의 상황은 교호를 만들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일(문과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는 오스만투르크가 그리스를 비롯한 발칸 반도를 침략한 것은 일제가 우리나라의 국권을 빼앗아간 것과 일맥상통한다약소국의 독립을 위해 힘썼던 인물을 교호에 등장시킨 것도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학생들의 독립의지를 표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입셀란테스의 독립에 대한 열망과 이를 실현하던 추진력은 보전 학생들이 일제에 맞설 수 있는 촉매제가 된 셈이다.

 

 

 

냉철한 지성으로 세상을 꿰뚫다

러시아 소설가이자극작가인 안톤 파블로비치 체호프(AntonPavlovich Chekhov, 체호프)1860년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모스크바대 의과대학에 진학했지만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유머잡지에 단편소설을 투고하기 시작했다. 그는 의학은 법적인 아내, 문학은 연인이라며 자신이 두 가지 직업을 가진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특히 의사로서 다양한 사연을 가진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글을 쓸 원동력을 찾을 수 있다고 믿었다. 19세기 대부분의 작가들이 거대한 관념과 이데올로기로 작품을 채우려할 때, 체호프는 날카로운 관찰과 객관적인 시각으로 개별적인 인간 군상을 그려냈다. 그는 인간의 일상을 철저히 관찰하고, 작품 속에서 있는 그대로 표현해 사실주의, 자연주의 작가로 명성을 날리기도 했다. 체호프가 30세가 되던 해, 새로운 영감을 찾기 위해 사할린섬으로 여행을 떠난 것은 그의 작품 기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는 러시아 본토에 떨어져있던 사할린섬에서 인간 이하의 삶을 살고 있는 유형수들을 보고 큰 충격에 휩싸였다. 러시아의 참담한 현실을 직시한 것이다. 이를 계기로 그의 작품은 전반적으로 어두운 색조가 지배적이게 된다. 체호프의 작품이 전하는 러시아의 암울한 상황은, 희망이 짓밟히던 우리나라의 식민지 상황과도 맞물렸다. 고일(문과대 노어노문학과) 교수는 체호프는 작품에서 미래를 기대하기 어려운 시대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했다이는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보성전문의 계몽 정신과 일치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체호프의 정신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상우(문과대 국어국문학과) 교수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탐구 정신, 인생에 대한 진지한 통찰력, 냉철하고 객관적인 예술정신을 오늘날 고려대 학생들이 교호를 외치면서 되새겼으면 한다고 전했다.

 

 

'항상 여기에 자유의 불을 밝히던인물

17 4 6 년 리투아니아에서 태어난 타데우시 코시치우슈코(Tadeusz Kosciuszko, 코시치우슈코)1777년부터 1784년까지 미국 독립전쟁에서 요새 건축 전문가로 활약했다. 전공을 인정받아 웨스트포인트(westpoint, 미국 육군사관학교)에서 요새를 짓는 책임자로 임명되기도 했다. 김용덕(한국외대 폴란드어과) 교수는 미국 의회가 코시치우슈코를 장군으로 임명한 뒤 막대한 상금을 수여했다하지만 그는 오히려 흑인 노예를 해방시키고 교육하는데 쓰라며 재산을 미국 자유주의자 토마스 제퍼슨(ThomasJefferson)에게 남겼다고 설명했다. 제퍼슨은 그런 코시치우슈코를 보며 내가 만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진솔한 자유의 아들이자 소수의 부자들만이 아닌 만인을 위한 자유의 아들이라고 평가했다. 미국 독립전쟁에서 이름을 떨친 코시치우슈코는1784년 폴란드로 돌아가 5년 후 폴란드군의 지도자로 선출됐다. 그가 이끄는 군대는 러시아 지배에 대항해 라츠와비체 전투에서 승리했고, 얼마 뒤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농민들을 해방한다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이러한 소식이 전해지면서 봉기는 폴란드 전역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이후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하면서 코시치우슈코의 봉기는 막을 내렸다. 러시아, 독일,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삼국 분할했던 암흑기에, 코시치우슈코가 폴란드는 물론이고 미국의 독립전쟁에 앞장섰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용덕 교수는 미국 독립전쟁 때 코시치우슈코는 우리들의 자유, 당신들의 자유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자국민뿐 아니라 세계인 모두가 자유를 누리도록 몸 바쳐 싸운 것은 학생들에게도 큰 귀감이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코시치우슈코가 보여준 불굴의 자유를 위한 투쟁정신은 보성전문 학생들의 민족 해방과 자유를 위한 투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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앎은 곧 실천아직도 살아있는 그의 사상

칼 마르크스(KarlMarx)1818년 태어나 대학생 때 철학을 공부했다. 박사학위를 받은 뒤 1842년 라인신문기자가 되지만 정부를 판하는 기사를 써 신문 발행이 정지됐다. 이에 1843년 파리로 망명한 마르크스는 프랑스의 유토피아적 사회주의 운동을 접하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사회주의 사상에 관심을 갖게 됐다. 때부터 그는 만물이 상품화되는 자본주의를 비판했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투쟁을 이론화했다. 이를 바탕으로 <자본론> 등 오늘날까지 널리 읽히는 글들을 저술했다. 특히 <포이에르바하에 관한 테제>에서 그는 철학자들이 지닌 관념론적 시각을 비판하며, 이론과 사상을 바탕으로 실천까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호 속에 마르크스가 등장한 것은 평등사상과 독립의지가 강했던 1920년대 상황이 반영돼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생한 뒤 일본이나 중국을 통해 사회주의 서적이 많이 유입됐는데, 노동자와 농민의 평등을 주장하는 사상은 한국 청년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윤태(인문대 사회학과) 교수는 러시아 혁명을 일으킨 레닌이 한국의 독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기 때문에 공산주의는 독립에 도움이 된다고 평가했을 것이라며 청년들은 사회주의의 유토피아적이고 평등주의적인 측면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 같다고 추측했다. 오늘날 대중들은 마르크스를 매우 급진적인 혁명가로 인식하지만, 사실 그는 이론과 실천의 통일을 추구한 사상가이자 실천가였다. 정일준(문과대 사회학과) 교수는 마르크스의 주장은 적실성을 상실한 것도 있지만 여전히 유효한 부분도 있다자본주의 사회에서 마르크스를 통하지 않고는 현실을 이해할 수도, 고칠 수도 없다고 강조했다. 뒤이어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을 꼼꼼히 읽어보면 우리가 사는 현대 사회를 이해하고 변형시키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사상가이자 실천가인 마르크스의 삶은, 이론과 지식을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발판으로 삼아야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정한솔 기자 delt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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