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11-21 15:10 (목)
증거에서 기억으로 … 민중의 삶까지 담아내다
증거에서 기억으로 … 민중의 삶까지 담아내다
  • 이선우 기자
  • 승인 2019.11.03 21: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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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의 민주화
기록이 민간 영역까지 확대되면서, 다양한 영역의 삶을 기억하려는 아카이브들이 생겨나고 있다.

  우리가 과거로 가지 않고도 인류의 축적된 경험과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건 그것들이 기록으로 남아있어서다. 사람들은 기록을 통해 과거의 모습을 간접 경험하며, 현재의 삶을 후대에 남길 수 있다. 하지만 그동안 기록이 국가, 권력 중심으로 쓰여져 왔다면, 시대적 변화에 따라 시민들이 직접 기록활동에 뛰어들고 있다. 민간에서 직접 기록을 수집하고 이를 공유하며 그들의 기억과 일상을 역사에 새기려 하는 상황이다.

권력에서 시민의 편이 된 기록

  기록은 한 사회가 남긴 경험이나 지식에 대한 유형(有形)의 증거다. 개인이 일상적으로 쓰는 일기나 정부의 공공문서까지 모두 넓은 영역의 기록에 속한다. 하지만, 기록을 관리해 후대로 전승하는 기록관리의 측면에서 기록은 레코드(records)와 아카이브(archives)로 정의돼왔다. 레코드는 공적이고 법적인 업무처리 과정에서 생산되는 모든 기록을 뜻하며, 아카이브는 레코드 중에서도 장기적이고 영구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남겨진 영구기록물을 뜻한다.

  기록을 업무처리의 맥락에서 정의한 것은 기록관리가 공공영역에서 이뤄지던 상황에서 그 증거적 가치가 부각됐기 때문이다. 조직 운영이 적법한 절차로 진행되고 있음을 입증하는 설명책임성을 가져야만 기록으로 인정받았고, 민간에 의해 생산되거나 민간의 삶을 다룬 기록들은 관심 밖에 머물렀다. 한국국가기록연구원 주현미 책임연구원은 증거로서의 기록은 권력자에게 업무를 증빙하기 위한 내용 위주로 쓰였고, 민간의 기록들은 관리되지 못했다그 과정 에서 기록이 일반인들과 멀어지게 됐다고 말했다.

  하지만 민주화의 도래로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기록물을 열람 가능한 환경이 조성되면서 기록을 증거로만 바라보는 기존의 시선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0년대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은 권력에 치우친 기록의 접근 및 생산 방식에 대해 반기를 들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란 권력 관계를 형성하는 배제와 차별의 근대성에서 벗어나 다양한 개개인의 주관성을 중시해야 한다는 사조다. 이에 따라 기존의 증거적 기록뿐만 아니라 여러 주제와 형식을 가진 기록도 기록으로 인정받아야 한다는 주장이 확산됐다. 노명환(한국외대 정보·기록학과) 교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과 기록학계 내부의 패러다임 변화는 기록의 주체를 권력자에서 일반 시민으로 변화시켰고, 결과적으로 기록의 범위를 확대했다고 말했다.

아키비스트, ‘관리자에서 생산자

  기록의 범위 확장에는 20세기 중후반 아키비스트(archivist)의 적극적 역할을 강조하는 흐름도 영향을 미쳤다. 과거 아키비스트가 가치중립적 시각을 가지고 이관된 기록을 그대로 유지·보존하는 것에만 초점을 뒀다면, 앞으로는 스스로의 주관을 바탕으로 시대의 가치를 기록해야 한다는 것 이다.

  아키비스트의 객관·주관을 둘러싼 문제는 여전히 논쟁의 대상으로 남아있지만, 아키비스트가 기록의 관리 및 보존이라는 본연의 기능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는 생각에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이정연(한국외대 정보·기록학과) 겸임교수는 기록에 대한 관점이 변화하면서 아키비스트 역시 자신을 둘러싼 사회문화적 배경에 민감할 수밖에 없고, 적극적으로 기록에 시대상을 반영해야 한다는 인식이 커졌다고 말했다.

  오늘날 아키비스트의 역할은 기존의 기록 관리자에서 서사를 바탕으로 기록을 재가공해 다양한 형식으로 서비스하는 큐레이터의 역할까지 확장됐다. 이용자들이 기록을 쉽게 열람할 수 있도록 열람 서비스를 간편하게 만들며, 기존의 기록들을 일정한 서사를 바탕으로 재구성해 전시하기도 한다. 또 기록 수집단계부터 나서서 주변의 이야기를 담고,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기록하는 기록 생산자의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다. 주현미 연구원은 이제는 아키비스트가 단순히 기록을 보존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자신만의 관점을 가지고 사회의 모습을 적극적으로 기록하려는 역동적인 존재가 됐다고 말했다.

기록 콘텐츠, 시대의 기억을 품다

  기록의 범위 확장은 최근 디지털 시대와 맞물리며 기록콘텐츠의 등장을 이끌고 있다. 기록 콘텐츠란 기록을 기반으로 가공된 콘텐츠나 사진·영상 등의 매체를 활용해 기록한 콘텐츠 자체를 의미한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부터 심각한 사회문제를 사실로 담아내는 다큐멘터리 필름(Documentary Film, 기록영화)이 대표적인 기록콘텐츠다.

  아날로그 환경에서 문자, 음성, 사진 등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했던 기록은 디지털 환경에서 서로 연계·융합돼 발전된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전자기록도 다른 디지털 콘텐츠들과 마찬가지로 서비스의 개선이나 활용의 요구가 높아졌다. 그 결과로 AIVR 등 신기술을 접목한 다양한 기록콘텐츠가 만들어졌다. 이정연 교수는 정보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기록콘텐츠의 매체나 형식도 같이 발전하고 있다일반 사람들도 기록에 보다 쉽게 접근하고, 직접 기록콘텐츠를 만들 수 있게 됐다고 전했다.

  기록이 민간 영역까지 확장되고 누구나 기록에 접근하기 쉬운 디지털 시대가 되며, 오늘날 기록콘텐츠의 생산은 민간이 주도하고 있다. 일상 기록부터 환경 보호, 좋아하는 연예인까지 모든 영역에 걸쳐 민간 중심의 기록콘텐츠가 생산되고 있다. 또 사라져서는 안 될 사회적 기억을 기록화하기 위해 공공 영역에서 다뤄오지 않았던 공동의 기억을 기록화하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주현미 연구원은 예를 들어 세월호와 같은 사회적 참사 속에서 기록을 수행하는 주체가 정부기관이 아닌 우리 스스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생겨났다사회적 기억을 기록화하려는 역사적인 움직임을 민간이 주도하게 됐다고 전했다.

공공영역에서도 민간 아카이브 지원해야

  하지만 민간 차원의 아카이브 운영이 쉬운 일은 아니다. 재정적 부담부터 아카이브 구축을 장기적으로 해나갈 지속성도 확보돼야 한다. 전문가들은 민간의 아카이브 활성화를 위해서는 정부와 지자체의 활발한 지원이 우선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주현미 연구원은 공공영역의 기록 관리에서 일상 기록 등 민간의 기록까지 모두 담당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 있지만, 그 흐름이 사라지지 않도록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행정기록에 집중하는 공공영역에서도 민간 영역의 기록 관리 및 생산에 있어 주민의 참여를 강조하고 있다. 지자체를 중심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는 마을 아카이빙 사업을 진행하거나, 기록관을 박물관·도서관이 함께 결합한 라키비움(Larchiveum)으로 운영해 기관과 시민들이 긴밀한 네트워크를 맺어 기록콘텐츠를 생산하는 하나의 축으로 삼기도 한다. 손동유 아카이빙네트워크연구원장은 최근 개관한 서울기록원에서 행정기록뿐만 아니라 서울 사람들의 일상기록도 함께 관리하겠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이러한 움직임이 단발성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민간의 아카이빙은 사회 각계각층의 삶의 모습과 기억을 기록하고, 그 기록화 과정에서 공동체 내의 지속적인 소통을 통해 사회를 건강하게 만들 수 있다. 노명환 교수는 기록의 실체도 중요하지만, 중심적 존재로 다뤄지지 못했던 사람들이 기록을 통해 상처를 치유하고 고통을 공유하도록 기록이 구성되는 과정이 강조돼야 한다고 말했다.

| 이선우 기자 ec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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