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가도 한 명의 독자로 텍스트와 소통하며 제 3의 언어를 만들어 나갑니다." 정영목 교수가 번역을 대하는 태도다
"번역가도 한 명의 독자로 텍스트와 소통하며 제 3의 언어를 만들어 나갑니다." 정영목 교수가 번역을 대하는 태도다.

원문의 불완전성에 의문 던져야

잘 살린 표현으로 논리 구조 담아내

 

 필립 로스(Philip Roth), 존 업다이크(John Updike), 알랭 드 보통(Alain de Botton). 현대 영미 문학의 대가들은 그를 통해 한국 독자를 만났다. 햇수로 30년 차, 여전히 번역을 고민한다는 영한 번역의 권위자 정영목(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교수를 만나 그의 번역 철학을 엿봤다.

 

- 고려해야 할 전제가 있나요

기본적으로 번역이란 원문(source text)과 번역문(target text)의 동의성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리 섬세한 번역이라도 원문과 번역문에 차이는 존재하기 마련이에요. 이 지점에서 저는 두 언어 간 차이뿐 아니라 언어 자체의 특성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번역이 단순히 원문의 표현을 번역문으로 옮기는 과정이라는 발상은 너무 기계적입니다. 원어와 번역어, 즉 우리가 상정한 두 언어 자체가 과연 완전한 것인지 의문을 던져야 해요. 특히 우리는 원문을 이미 완벽하고 고정된 것이라 전제하고, 이를 어떻게 번역문으로 잘 치환할 것인지 고민하는데, 원문의 의미와 표현 자체가 미완의 상태일 수 있다는 것이죠.”

 

- 원문의 불완전성은 번역과정에 어떤 영향을 주나요

번역을 떠나 먼저 일상적 대화 상황을 가정해 봅시다. ‘The sky is blue’라는 텍스트에서 화자가 부여한 의미는 선취 됐다고 보기 힘들어요. 청자에 따라 각기 다른 의미로 이해되기 때문이죠. , 의미는 텍스트와 독자의 상호작용 과정에서 그 순간에 형성돼 나가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문학의 해석에서도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냐를 갖고 논쟁이 벌어지죠. 텍스트에서 증거를 갖고 자신의 해석을 옹호할 수만 있다면 다양한 해석은 얼마든지 허용됩니다.

 번역과정에서도 ‘the sky’가 밤하늘인지, 비 오다 갠 하늘인지와 같은 단서가 충분하게 주어지는 경우는 드뭅니다. ‘blue’의 번역어로 푸르다’, ‘퍼렇다’, ‘푸르스름하다가 모두 올 수 있죠. 확실한 오역이 아니라면, 앞선 번역어들의 우열과 옳고 그름을 가릴 수 없습니다. 원어와 번역어라는 이항 구조 속에 완벽한 번역이 존재한다는 생각 자체에서 벗어나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봐요. 이렇게 언어 자체가 미완이고, 의미는 읽는 순간 형성된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번역을 합니다. 번역가도 한 명의 독자로 원작자의 텍스트와 소통하며 완전한 치환 번역이 아닌 제3의 언어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죠.”

 

- 문장의 길이나 단락의 부피감 같은 원문의 형태적 환경은 어떻게 반영하나요

표현과 의미는 분리하기 어렵다고 생각해요. 마치 여름날 끈적하게 엉겨 붙은 사탕과 껍질처럼, 애초에 사탕 알이라는 의미가 사탕 껍질이라는 언어 표현과 완전히 분리될 수 있냐는 문제가 있어요. 숙어 표현을 사용할 때도 그 자체가 주는 무게감에 따라 상황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뀔 수 있죠. 심지어 학술 이론 서적에서도 표현 스타일로 원작자의 사고방식과 발상을 엿볼 수 있어요. 번역과정에서 원작자의 표현을 잘 살리는 것으로 내용의 내밀한 논리까지 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문장의 길이를 고려할 때도 가시적인 길이 자체보다는 생각의 흐름을 우선시합니다. 가령, 문장이 짧게 끊긴 것이 호흡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 형태를 무조건 가져올 필요는 없겠죠. 반대로 단문의 연속이 생각의 흐름을 그대로 드러낸다면 형태가 번역의 높은 우선순위로 올라옵니다.”

 

- 번역과정에서 크게 느껴지는 언어 간 차이는 무엇인가요

영어에는 관계사를 통해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문장 구조가 일반적인데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수식을 통해 문장을 확장하는 구조라는 걸 크게 체감합니다. 이러한 문장 구조 차이가 부담스러운데, 문장 구조가 곧 생각이 덧붙여지는 방식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문이 있는데 그 문으로 아버지가 들어간다아버지가 들어가신 문이다는 다르잖아요. 생각의 흐름을 표현하려고 할 때 언어 간 차이로 발생하는 괴리를 고려해야 하는 것이죠.

 수십 년 번역작업을 해왔지만, 아직도 어려운 부분은 역시 화법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모더니즘 기법과 연관된 자유간접화법이에요. 자유간접화법에 대응하는 한국어 표현 규범이 정착돼있지 않아 번역할 때 굉장히 난해합니다.

 이 외에도 당연히 한국어와 영어의 기본적인 어순 차이 등의 문제가 있지만, 원문의 생각이나 논리의 전개를 엉클어트리는 요소들이 제게는 가장 큰 난관입니다.”

 

- 번역어의 가독성이 좋아야 독자가 편히 텍스트를 읽을 텐데, 이는 어떻게 고려하나요

맥락을 구성해 나가는 긴 텍스트에는 논리적 흐름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저는 이 논리를 정확하게 잡아주는 표현이야말로 번역의 가독성을 높인다고 생각해요. 기본적으로 텍스트 논리에 맞는 최선의 선택지라면 번역어에서 생경한 표현일지라도 쓸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언어의 표준적 규범 안팎을 오가며 논리를 전개하는 문학 번역에서 더 그렇겠죠. 가독성이 번역어 규범을 따르고 표현의 자연스러움만을 의미한다면 저는 가독성의 우선순위를 낮게 두는 편입니다.”

 

- 독자 맥락에서 로컬라이징이 이뤄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영화 <기생충>의 한영 번역이 서울대를 옥스퍼드대로 표현했는데요

긴 주석을 달기 어려운지라, 영화에서 파격적인 로컬라이징이 이뤄지면 화제가 되곤 합니다. 소소하지만 서적에서도 로컬라이징은 빈번하게 발생합니다. 와인을 무조건 포도주라고 번역해야 할까요? 번역이 번역 아닌 것처럼, 가독성이나 표현 측면에서 한국어 서적 같아야 한다는 의견도 많지만, 저는 번역은 번역 같아도 된다고 생각해요. 오히려 번역은 외국 서적임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보여주는 것이라고 봐서 개인적으로는 로컬라이징을 선호하지 않아요. ‘메리가 한국어를 하는 건 이미 말이 안 되는 상황입니다.

 

- 번역가로서 교수님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제 번역이 한국어가 수용할 수 있는 폭을 넓히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거창하죠(웃음). 작가들은 다양한 언어권의 작품을 접하며 자신의 발상과 언어 표현의 방식을 확장해 본다고 해요. 번역도 다른 언어와 엮일 때 새로이 보이는 한국어의 가능성을 확인할 좋은 기회를 주죠. 제 번역이 이런 문장도 괜찮겠다싶은 예시가 돼 한국어의 영역을 넓혀나간다면 보람찰 것 같습니다.”

 

김예정 기획부장 breeze@

사진양태은 기자 aurore@

 

2008년에 <로드>로 제3회 유영번역상을, 2013년에 <유럽문화사>(공역)로 제23회 한국출판문화상(번역부문)을 수상했다. 역서로는 <미국의 목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브리맨>, <달려라, 토끼> 등이 있으며, 인문서로는 <프로이트>, <>, <축의 시대>, <불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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