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오수(문스대 스포츠과학18) 씨는 장거리 통학생이다. 부산에서 조치원까지 차를 타고 통학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새벽 4시에 출발해서, 부산에 다시 도착하면 거의 자정이야. 1학년 중간고사 즈음 더 이상 못 하겠다 싶어서 월세 방을 잡았지. 시험기간엔 23일 정도 잡고 조치원에 머물러.”

  아직 3학년인데, 다음 학기가 마지막 학기라고 한다. 조기졸업을 위해 계절학기도 수강하며 118학점을 채웠다. 성적 나오면 조기졸업을 신청할 예정이다. 앞서가는 우등생, 근데 자꾸 머리를 탓한다. “열심히 공부를 하긴 하는데, 나이가 많으니 금방 까먹어. 한계가 와. 그래서 반복하고 또 반복하지.” 1957년생 64세 만학도, 제오수의 이야기다.

 

  현업은 스포츠용품 개발자다. 신발부터 헬멧까지 개발하고 수출한다. “부산까지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네.” 기자가 인터뷰를 위해 부산에 내려간다 하니, 제오수 씨와 친한 학생들도 몇 명이 따라붙었다. 부산역에 마중 나온 제오수 씨는 학생들을 데리고 바다가 보이는 전망 좋은 횟집에서 밥을 먹였다.

 

학생들과 횟집에서 식사 중

 

  송도해수욕장, 광안대교 등 부산 명소 곳곳을 돌며 드라이브도 했다. 끝나지 않을 듯 길게 이어진 광안대교 위에서, 운전대를 잡은 그에게 지나온 길을 물었다.

송도해수욕장 등 부산의 명소를 드라이브하며 담소를 나눴다.

 

  “부산이 고향은 아니야. 태어난 데는 경상남도 사천. 아홉 남매 중 일곱째였어.” 위에서 치이고 아래서 치이기 좋은 미운오리였다. “망해서 갔지. 내가 국민학교 6학년 때 첫째 형이 가업을 물려받아서 사업을 했는데, 망해서 온 가족이 부산으로 내려갔어. 나 중학교 입학해야 할 때 셋째 형이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어. 가난한 살림이라 자식 하나 학비 보태는 건 온 가족 몫이었지.”

  중학교 입학도 못하고, 철공소에 들어가 돈을 벌기 시작했다. 12, 사회생활 시작이었다. “철공소만 갔나. 새벽 네 시에 일어나면 신문도 돌리고, 도시락 싸서 공장 다녔어.” 또래들은 한창 책가방 들고 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언제 신문이 늦게 도착해서, 등교시간에 한창 배달을 하고 있었는데 교복 입은 동네 친구들이 나보고 그러더라고. ‘! 제오수, 공장에 안가?’ 그때부터 못 배웠다는 건 가슴의 응어리였다.

  열일곱 즈음 일하다 벽보를 봤다. ‘일하며 공부하자.’ 검정고시 응시를 권하는 벽보였다. “오케이, 뭐든 한번 해보자. 그때부터 보수동, 서면 근방 헌책방에서 책을 사다가 독학을 시작했어. 낮에는 공장 일하고, 저녁에는 검정고시를 공부했지.” 1년 만에 중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했다. 고등학교 검정고시는 통과 못 했다. “공장에서 공부하는 걸 눈치 주더라고. 눈치 봐가면서 공부하니 공부가 잘 되겠어? 그러고 군대 갔지.”

  군대에서는 행정병 일을 했다. “글씨를 잘 쓴다는 이유로 행정병을 시키더라고. 차트를 작성하는 일을 맡았어. 근데 이게 나중에 도움이 될 줄 누가 알았나. 내 인생을 바꿨지.” 그는 군대에서 배운 실무능력으로 제대 후 들어간 신발제조회사 국제상사에서 눈도장을 찍었다. “회사에서 성과 작성이나 브리핑을 해야 하는데, 할 사람이 없었어. 그때 내가 맡아서 한다고 하니까 과장이나 부장이 괜찮게 봤던 것 같아.”

  현장직이었던 그가 신제품 개발 부서로 옮기게 된 것도 능력 덕이다. “들어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는데, 상사가 날 갑자기 불렀어. 난 혼나는 줄 알고 겁먹었는데, 알고 보니 혼나는 게 아니라 신제품을 개발하는 부서로 옮기라는 거였어.”

  산업화가 무르익던 1980년대. 당시 부산에는 국제상사’, ‘화승그룹’, ‘태광그룹등의 향토기업들이 신발 제조로 성장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었다. 당시 기업들에게 제오수 씨는 스카웃 1순위였다. “화승그룹에 스카웃 돼 공채 1기로 들어갔다가 태광그룹에서 또 나를 낚아채서 옮겼지. 태광그룹은 그때 작은 회사였는데, 다 같이 고생해서 회사를 크게 성장시켰어.”

  리복(REEBOK) 한국지사 창설의 주역이기도 했다. “태광그룹에 있을 때, 리복 사업주인 폴 파이어맨(Paul Fireman)이 직접 디자인한 에어로빅슈즈의 개발을 국내 회사에 맡기려고 했어. 그때만 해도 리복은 생소한 브랜드라 다들 맡지 않으려 했는데, 선뜻 나섰지.”

  그때 제오수 씨가 만들어낸 에어로빅 슈즈 프리스타일은 세계적으로 초대박이 났다. 리복 한국지사에선 1년에 6억 달러, 우리 돈으로 3600억 원(1980년도 환율 약 600) 가까이 성과가 났다. 하지만 제오수 씨는 일찍 찾아온 성공에 적응을 못 했다. 우연한 기회, 순조로운 흐름에 몸을 맡겨 얻은 성공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그전만 해도 작은 철공소에나 다녔는데, 좋은 차에, 개인기사, 건물까지 내 것이 되더라고. 생활환경이 180도 바뀌었지.”

  남들은 부럽다고만 하는 인생, 제오수 씨는 결국 자리를 내려놨다. “사람들이 미쳤냐고 물어. 근데, 내 삶이랑 안 맞잖아. 내가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만두고 나와서 내 회사를 차렸지.” 현재 그가 대표로 있는 에스비(1989년 설립 당시 서봉레인져개발주식회사’)의 탄생 스토리다. 사업 중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 등의 경제위기로 고비도 있었지만, 현재까지 75개국 이상과 교역하며 꿋꿋이 버티고 있다.

제오수 씨는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이별을 아쉬워 했다.

 

  여전히 공부에 목마르다

  능력도 있고 대표도 됐지만, 여전히 중졸인 그를 바라보던 삐딱한 시선. 사회적 성공으로 무학벌을 안주하기엔 마음 한구석이 여전히 시렸다. “외국 거래처랑 미팅을 할 때 영문과를 졸업한 직원들은 막 유창하게 설명을 해. 그래서 테이프로 영어공부를 했는데, 사장이 그걸 보고 내가 놀고 있다고 오해를 한거야. 다행히 오해가 풀려서 사장은 날 열정있는 사원이라 생각하긴 했을 거야.”

  열정. 환갑이 된 나이. 제오수 씨는 다시 한 번 해보자마음먹고 가족도 모르게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2017년 고등학교 검정고시를 합격하고, 내친김에 대학 입시도 도전해보자 해서 고려대에 원서를 넣었다. “면접 볼 때 일반 학생한텐 따로 전화가 안 가는데, 나이가 많아서 그런지 나한텐 안내 전화를 넣어줬어. 그걸 집사람이 받았는데, 장난전화인 줄 알고 학교에 화를 냈다지.(웃음)”

  처음 발들인 대학의 교정. 다른 세대, 다른 생각들로 가득 찬 공간이었다. “젊은 사람들 열정 넘치는 모습을 보니까 나도 어릴적으로 돌아간 것 같아. 우리 과 CNS(스포츠과학 학술 소모임) 애들은 술도 잘 먹더라고.” 제오수 씨도 지지는 않았다. 같이 새벽까지 남아서 모임을 즐겼다.

  자식보다 어린 나이의 선·후배들. 요즘 애들 다 놀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 많지만, 곁에서 지켜보기에 열심히 살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애들 노는 것 같아도 자기 할 것은 잘 챙겨. 내 자식보다 어린 나이의 친구들이 열심히 사는 것을 보면 챙겨주고 싶어. 내가 보기엔 다 귀엽지.”

  포기하지 않는 것. 말을 길게 늘이진 않았지만, 그는 창밖으로 바다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최선을 다하라고 말했다. “이제 졸업이 얼마 안 남아서 자주 보긴 힘들겠지만, 간간히 시간 내서 보자고.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 좌절하지 말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 젊은이들에게 반드시 기회가 오기 마련이니까.” 지난 날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글 | 이성혜 기자 seaurchin@

사진 | 두경빈 기자 hayabu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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