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러·중앙아시아 문화의 공존

관광지보단 조용한 ‘생활 터전’

진정한 정착 위한 ‘너머’의 노력

 

땟골마을 입구의 안내판 모습. 안산시 선부동에 위치한 땟골마을에는 약 7000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경기도 안산시의 한 마을에는 서로 다른 국적의 동포들이 각자의 문화를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4호선 안산역에서 자동차로 5분 남짓 거리, 이국적인 모습이 눈에 뛰는 선부동의 땟골마을이다. 마을에 띠(볏과의 여러해살이풀)가 많이 자란다고 해서 띠골이라고 불리다 시간이 지나며 땟골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지난 18일 정오, 비가 내릴 듯 흐린 날씨 속 땟골을 방문했다.

 

러시아식 케이크를 판매하는 마리나 베이커리와 주변 모습. 이 밖에 땟골마을의 거리에는 러시아어 간판을 단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이곳에 사는 동포들은 대부분 고려인이다. 고려인은 러시아나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우크라이나 등 독립국가연합 등지에 터전을 둔 한국인 동포다. 조선 말, 한국에서 연해주 일대로 이주한 이들은 독립운동에서 공을 세우며 민족을 위해 싸웠지만, 1937년 스탈린에 의해 강제이주를 겪고 중앙아시아 곳곳에 뿔뿔이 흩어졌다. 소련 해체 이후 고려인들은 조금씩 국내로 이주해 공단이 많은 안산시, 광주광역시, 청주시 등에 정착했다. 그중에서 안산은 반월공단 등 공단지대가 많고 서울과 인접해, 많은 고려인이 자리 잡았다. 이곳에 사는 고려인은 20204월 법무부 통계 기준 16519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큰 수치다. 그중 약 7000명의 고려인은 땟골마을에 터전을 잡고 있다.

 

땟골서 맛본 고려인 밥상

 

고려인식 잔치국수(위)와 된장찌개 ‘북자이’(아래). 토마토 등 낯선 재료가 들어갔다.

   땟골마을 중심거리는 인적이 적고 한산했다. 고려인문화센터에서 만난 김명숙 ‘()너머사무국장은 공단 노동자들의 근무 교대시간인 저녁 7시가 돼야 거리에 사람들이 보인다고 전했다. 거리에는 러시아어 간판을 단 건물들이 줄지어 있다. 마을 사람에게선 한국어보단 러시아어가 자주 들렸다. 이날 땟골마을에서 만난 고려인들은 모두 성실히 일하며 삶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기자가 한국어로 말을 걸자 말이 통하지 않아도 손짓을 이용해 친절하게 응했다. 1800년대 러시아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였던 니콜라이 프르제발스키가 고려인촌을 방문했을 때 고려인은 예의 바르고 친절하고 부지런한 민족이라고 기록했다는 일화를 떠올리게 했다.

  땟골마을에서 고려인 현지식당으로 유명한 음식점 에비뉴(Avenue)’를 찾았다. 러시아 음식을 비롯해 중앙아시아의 다양한 음식을 판매하는 이곳에는 손님들의 러시아어와 러시아 대중가요가 들렸다. 메뉴판에는 여러 중앙아시아 음식 중 고려인의 된장찌개인 북자이와 고려인식 잔치국수가 있었다. 러시아 문화권의 영향으로 의외의 재료가 들어가서인지 익숙하면서도 낯선 음식이 나왔다. 된장찌개에는 토마토와 양배추, 그리고 달걀 하나가 통째로 들어갔다. 간장 국물이 자작한 잔치국수에도 토마토가 들어갔는데, 띠비(tibi)라고 불리는 고추 소스를 곁들인다. 이 식당을 7개월째 운영하는 안나 톨리(·34) 씨는 카자흐스탄 출신 고려인이다. 그는 서툰 한국말에도 이곳 음식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다.

  그가 추천한 곳은 식당 건너편에서 러시아식 식자재를 취급하는 식료품점 임페리아푸드였다. 러시아식 과일잼부터 햄, 버터, 가공치즈까지 다양한 음식이 진열돼 있었다. 한쪽에서는 러시아식 식사용 빵도 팔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배추김치와 닮은 반찬 등 여러 조리식품도 있었다소금에 절인 배춧잎이 포개어져 있고 고춧가루가 섞인 양념으로 버무린 모양새였다. 우즈베키스탄 출신이라는 고려인 직원은 선뜻 반찬을 꺼내 보이더니 짐치(고려인식 김치)’라고 소개하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새우(젓갈)가 들어가지 않아 양념이 좀 달라요. 원래 김치라고 불렸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발음이 짐치로 변했다고 해요.” 이 가게의 다양한 음식에서도 느껴지듯이, 실제로 고려인들은 여러 문화권에서 비롯된 식문화를 가지고 있다. 러시아와 한국의 문화가 공존하다 보니 빵과 밥 둘 다 주식이 되고, 문화가 전승되는 과정에서 변형된 한식을 먹게 된 것이다.

 

귀환 너머참된 정착으로

 

고려인 지원단체 ‘(사)너머’가 위탁 운영하는 고려 인문화센터에 위치한 전시관의 일부 모습.

  오후 2, 학교를 마친 고려인 초등학생들이 친구들과 집으로 돌아가며 러시아어로 대화하고 있었다. 거리에는 유아차를 끄는 노인, 자녀를 데리고 외출한 어머니 등 가족의 모습도 보였다.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에 따르면, 최근 몇 년 사이 고려인들이 이처럼 가족 단위로 정착하는 경우가 많아져, 2017년 기준 국내입국 고려인들 중 71.4%가 가족동반입국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안산시는 고려인 자녀들의 적응을 도울 언어교육에 특히 힘쓰고 있다. 시에서는 별도로 외국인주민지원본부를 운영하며 한국어 교육을 하고 있고, 지역 내 학교마다 한글반에서 고려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고려인들의 정착 과정에서 구심점 역할을한 것은 고려인 지원단체 너머. 2011년 땟골마을에서 한글야학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고려인문화센터를 위탁 운영하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국내 거주 고려인 동포의 안정적인 정착을 위해 여러 방면에서 노력하고 있다고려인을 위해 한국어 교육을 시행하고, 역사 교실이나 역사 전시관을 통해 고려인 디아스포라의 역사를 고려인 후세들에게 전달하는 역할도 한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고려인 유민준(문과대 노문21) 고려인청소년봉사단 부단장은 본국에서는 고려인의 정체성이나 역사에 대해 가족 어른들에게 구전되듯이 배운 게 전부였는데, ‘너머에서는 공식적인 교육을 받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글 | 김영은 기자 zerois@
사진 | 강동우 기자 ellipse@
사진제공 | 너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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