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았지만 길고 깊게 가꾼 인연

가족 대신 동기들이 묘소 돌봐

 

  1978년 10월, 故 주재성(이과계열 78학번) 교우가 고대신문사에 입사하고 한 달 만에 교통사고로 목숨을 잃었다. 주 교우는 경상북도 울진군의 봉평해수욕장 인근 마을 출신이었다. 당시 봉평은 오지 중의 오지였다. 주재성 교우의 부모님은 친척에게 소식을 전해 듣고, 서울로 올라갔다. 주 교우의 여동생인 주소영(여·61) 씨는 집에 남아있어야 해서, 그의 마지막을 함께하지 못했다. “마지막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이 너무 한이었어요. 나중에 결혼한 다음, 남편과 오빠를 찾아가야겠다고 결심했죠.”

  울진에서 서울은 버스를 타고 4시간이 넘는 거리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았던 1980년대에는 쉽게 서울에 갈 수 없었다. 주소영 씨는 20년 동안, 여러 사정 때문에 주재성 교우의 묘소를 방문하지 못했다. 1998년, 우연한 기회로 집안 친척들과 주재성 교우가 묻혀있다는 경기도 포천을 찾아갔다. “당시에 태풍과 산사태가 심했었어요. 그래서 걱정을 안고 오빠에게 찾아갔던 것 같아요.” 기억을 더듬어, 주 교우의 묘소를 찾아갔지만, 그 자리에 묘소는 없었다. 사무실에 찾아간 주소영 씨는 공원 관리인에게 그간의 사정을 듣게 된다. 

  가족들이 찾아오지 못하는 동안, 故 주재성 교우의 묘소를 그의 고대신문사 동기들이 관리를 해왔다. 1991년, 김종필(국어국문학과 78학번), 설동훈(경제학과 78학번), 심상영(물리학과 78학번), 이윤호(영어영문학과 78학번), 전상우(독어독문학과 78학번) 교우들이 주 교우의 묘소를 방문했을 때, 묘소는 엉망이 돼 있었다. 전상우 교우는 “1991년, 재성이의 묘를 정비하고, 시간이 될 때마다 친구들과 찾아가 관리를 했습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1994년, 심상영 교우(좌)와 설동훈 교우(우)가 故 주재성 교우의 묘소를 바라보고 있다.
1994년, 심상영 교우(좌)와 설동훈 교우(우)가 故 주재성 교우의 묘소를 바라보고 있다.

  주소영 씨는 주 교우의 동기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마움을 느꼈다. 주재성 교우의 동기들은 그와 만난 지 한 달밖에 안 되는 사이였다. “매년 찾아가서 관리비를 내고, 관리를 해줬다는 것에 너무 감동했어요. 죽은 정은 멀어진다지만, 죽음을 뛰어넘은 돈독한 우정을 느꼈어요.” 공원 관리인에게 연락처를 받은 주소영 씨는 교우들에게 해마다 오징어와 김치 등을 비롯한 음식을 보냈다. 그렇게 연이 이어져, 주소영 씨의 가족과 교우들은 돈독한 사이가 됐다. 주소영 씨의 부모님이 세상을 떠날 때도, 교우들은 곁을 지켜줬다. 

 

故 주재성 교우의 가족과 그의 동기들은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故 주재성 교우의 가족과 그의 동기들은 인연을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주 씨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날 때  인연을 끊지 말고 지속하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도 주소영 씨의 가족과 교우들은 주기적으로 만나, 김치를 함께 담그는 등 인연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윤호 교우는 “재성이가 저희에게 남긴 선물이라고 생각해요. 앞으로도 소중히 여기고, 이 인연을 이어 나가고 싶습니다”고 전했다.  

 

글 | 이원호 취재부장 onelike@

사진제공 | 심상영, 전상우 교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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