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어느 광고 카피의 한 구절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이’의 벽은 높기만 하다. 취업을 비롯해 각종 권리의 행사에 있어서도, 나이가 많거나 어리다는 이유로 제외되기 일쑤이다.

경실련과 취업정보업체 리크루트가 지난 2002년 3월20일에 발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61개 대기업 중 채용 연령제한 규정을 유지하는 업체는 34개로 55.6%에 달했다. 이들 기업은 주로 28~29세를 전후해 나이를 제한했다. 남학생의 경우 군복무를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면 바로 26~27세가 되기 때문에 몇 년만 늦어지면 취업의 기회 자체가 없다.

여성 구직자의 경우에도 남성보다 연령제한 기준이 2~3년 정도 낮은 경우가 보통이라서 남성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IMF이후 취업난이 가중되면서 연령제한은 구직자들에게 더욱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취업준비로 2년 정도를 보내면 연령제한에 걸려 취업이 아예 되지 않는다. 연령제한이 넘어가버린 구직자들은 취업을 포기하고 장기실업자의 길로 빠지기도 한다.

연령제한에 걸리기 전에 취업하기 위해 원하지 않는 직장을 지원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연령제한은 경력직도 예외가 아니다. 지난 2월 15일 한국직업능력개발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서울과 수도권 일대의 기업 2백여 곳 중 51%가 경력직 채용에서 연령제한을 두는 것으로 밝혀졌다. 제한연령으로는 38세 이하가 65%를 차지했다. 27세 정도에 입사를 한다고 치면, 10년 이상 일한 사람은 이직을 하기도 어렵다는 말이 된다.

구직자들의 연령제한에 대한 반발이 심해지면서, 연령제한을 폐지하자는 움직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여성단체협의회는 지난 2002년 8월 연령제한에 대한 실태조사에 들어갔다. 이들은 취업사이트의 구인정보를 조사해 연령제한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지를 알아봤다. 그리고 전문가 워크숍을 통해 연령제한의 문제점을 점검했다. 조순경(이화여대 여성학과)교수 등 여성학·사회학 교수 5명의 모임인 차별연구회는 지난해 12월 국가인권위원회에 공기업의 연령제한 폐지를 건의하는 진정서를 제출했다.

국가인권위원회도 공무원의 연령제한 폐지를 검토하고 있다. 현재 공무원 임용시 연령제한은 9급이 28세, 7급이 35세, 5급이 32세이며 인권위는 이것을 폐지하거나 상한선을 높일 것을 계획중이다. 인권위는 전문가와 각 부처별의 의견을 수렴해 올 상반기 내로 연령제한에 대한 대책을 마련할 예정이다.

자발적으로 연령제한을 폐지하는 기업들도 생겨났다. 한국관광공사는 올해 신규직원 채용에서 연령제한을 폐지했다. 공기업으로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언론사나 사기업도 이에 동참하고 있다. KBS와 한화그룹은 올해 신입사원 모집에서 연령제한을 두지 않았다.

이들이 연령제한을 없앤 것은 구직자들의 처지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기업의 효율성 차원에서 이뤄진 면이 더욱 크다. 한화그룹 홍보팀 직원 김희영 씨는 “최근 취업난으로 인해 연령제한을 넘어버린 고급인력들이 많이 있다”며 “이들을 다른 기업보다 먼저 받아들이기 위해 연령제한을 두지 않았다”고 말했다.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기는 하지만 여전히 연령제한의 문턱은 높기만 하다. 올해 신규채용을 실시한 15개 공기업 중 11개의 기업이 연령제한을 적용했다. 이들은 연령제한이 내부규정이기 때문에 바꾸기가 어렵다고 밝혔다.

하지만 구직자들은 이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구직자들은 각 공기업 홈페이지를 찾아 항의글을 남겼다. 김미자 YWCA 사회개발위원회 팀장은 “공기업마저 연령과 학력제한을 하는 것은 청년 취업난 해소를 위한 정부의 일자리 창출 계획을 무색하게 하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업들은 연령제한에 대한 비판은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폐지는 어렵다는 반응이다. 연령제한이 오래전부터 이뤄져 왔고, 바람직한 조직문화를 위해서는 연령제한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나이많은 부하직원이 있으면 조직 내 관계설정이나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긴다는 것이다. 따라서 연령제한은 필요악으로써 존재한다는 것이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권위를 강조하는 기존의 조직문화가 점차 변하고 있는 시점에서, 굳이 연령제한을 고수할 필요가 있냐는 입장도 있다. 한화그룹 홍보팀 직원 김희영 씨는 “주5일근무 등 기업문화가 연공서열 중심에서 능력중심으로 흘러가는데, 연령제한이 조직문화에 얼마나 기여할지는 의문”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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