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이제 때가 되었습니다. 역사의 시계는 종을 울리고 있습니다. 형식을 뛰어넘고, 형식으로부터 자유로워지도록 노력하십시오”
 - 비톨드 곰브로비츠(Witold Gombrowicz)

사르트르나 까뮈 보다 한발 앞서 소설에 실존철학을 접목시키는 획기적인 시도로 20세기 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던 비톨드 곰브로비츠(1904~1969), 올해로 그의 탄생 1백주년이 되었다.

폴란드 문단에서 곰브로비츠는 B. 슐츠, S.I. 비트키에비츠와 더불어 ‘모더니즘의 3대 거장’으로 손꼽힌다. 부친의 권유로 법학을 전공하고, 파리에서 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했으나 문학을 향한 애틋한 꿈을 접지 못했던 곰브로비츠는 1933년에 자비로 단편집 <성장기의 회고록>을 출판하면서 작가의 길로 들어섰다. 1937년에 발표한 첫 장편소설 <페르디두르케>(1937)는 보수적인 평단으로부터는 혹독한 비난을, 젊은 지식인 사이에서는 열광적인 지지를 얻었다.
곰브로비츠는 아르헨티나로 취재 여행을 떠났다가 2차대전 개전 소식을 듣고 망명을 결심했고, 이후 영원히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냉전시대, 서방으로 망명한 폴란드 작가들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문예지 <쿨투라 Kultura>(폴란드어로 ‘문화’라는 뜻)의 간행에 관여하기도 했다. 이 잡지는 프랑스 파리에 설립된 ‘폴란드 문학 연구소’에서 발행됐는데 곰브로비츠 외에도 1980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폴란드 소설가 체스와프 미워쉬 등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곰브로비츠는 낯선 타국에서 언어문제와 생활고 등으로 시련을 겪으면서도 창작 활동을 멈추지 않았다. 1969년 프랑스 방스에서 사망할 때까지 <대서양 횡단>(1957), <포르노그라피아>(1960), <코스모스>(1965) 등의 장편 소설과 <브루고뉴의 공주 이보나>(1935), <결혼>(1946) 등의 희곡, 자전적 에세이집 <일기>(전 3권: 1957, 1962, 1966) 등의 대표작들을 남겼다.

곰브로비츠의 작품들은 사회주의 국가로 변모한 폴란드에서 30여 년 동안 출판이 금지되는 불운을 겪었다. 그는 <페르디두르케>, <일기> 등의 작품에서 날카로운 풍자와 패러디 기법을 동원해 폴란드 문학이 안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에 통렬한 비판을 가했다. 민족의 운명에 지나치게 집착하는 폴란드 문학의 특성이 오히려 개인의 창조적인 진보나 독립성을 방해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보수적인 틀에 갇힌 민족적 전통은 불필요한 허식, 공허한 집단행동에 불과하다고 단언했다.

오랫동안 외세의 지배를 당하는 수난의 역사를 겪으면서 문학의 사명을 유달리 강조해왔던 폴란드 문단에서 곰브로비츠의 이러한 태도는 일종의 반역 행위로 여겨졌고, 사회주의 정부는 그의 저서들을 금서목록에 올렸다. 그러나 해외문단에서는 달랐다. 민족적 특수성을 넘어서 인간 본성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던 곰브로비츠는 ‘실존주의 문학의 원조’, ‘20세기의 진정한 거장’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열렬한 환호를 받았다. 대표작 <페르디두르케>의 경우 1947년 작자 자신에 의해 스페인어 번역판이 출판된 이래 30개 국어로 번역돼 전 세계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곰브로비츠의 “예술가의 역할은 철학을 아름다운 매혹 속에 마법처럼 빠트리는 것”이라는 말처럼, 그의 작품 속에는 바로 이러한 작가의 예술관이 고스란히 투영돼 있다. 그는 철학적인 주제를 익살스런 형식으로 포장해 풍자적인 필치로 그려냄으로써 현대인의 삶에 내재된 상투성을 날카롭게 포착했다. 그의 작품 속에는 성숙과 미성숙, 완성과 미완성, 정상과 비정상의 대립 구조가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이는 관념적 이분법의 허구성을 폭로하고, 질서와 규율의 이름으로 다스려지는 현대 사회의 모순을 다층적으로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망을 인위적인 정상의 틀에 맞추려는 모든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보내는 일종의 장엄한 ‘조소’이자 실존에 관한 절실한 ‘물음’인 셈이다. 그로테스크와 넌센스, 유머를 적절히 반죽해 인위적인 가벼움을 표방하지만 그의 작품 앞에 어김없이 ‘철학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기존의 발상을 과감하게 뒤집는 전위적인 시도는 대표작 <페르디두르케>의 결말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제 끝이다, 만세! 이 책을 읽은 자여, 그대는 어리석다!”

곰브로비츠에 따르면 인간은 결코 스스로 자신이 될 수 없으며, 타인에 의해 ‘만들어지는’ 존재다. 우리는 자신에게로 향하는 주위의 기대에 따라 행동하고, 그 틀에 자신을 맞추면서 스스로를 ‘가면’으로 무장하고 있다. 작가는 말한다. 사회 속에서 관습이나 문화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타인에 의해 형상화되고 구속당하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기에 우리 모두는 가면으로 상징되는 형식의 굴레에서 도망칠 수 없노라고.

곰브로비츠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타인과 어울리기 위해 쓴 가면과 자신의 내면에 감춰진 자아 사이에 생겨나는 비극적인 불균형에 맞서 맹렬하게 저항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으면서도 타인과의 소통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신호를 보내고 있다. 다소 엉뚱하고 발칙하며 우스꽝스럽고 대담한 곰브로비츠의 작품이 세기를 건너 변함없이 독자들을 사로잡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폴란드에서는 곰브로비츠 탄생 1백주년을 맞아 2004년을 ‘곰브로비츠의 해’로 정하고, 학술대회, 도서전, 사진전, 음악회 등 각종 기념행사가 한창이다. 망명작가라는 이유로 생전에 조국에서 인정받지 못했던 이 불운한 천재를 기리기 위해 기념우표와 포스터가 발행됐고, 그의 작품세계를 재조명하는 다양한 연구서적들이 활발하게 출간됐다. 오는 10월 6일~10일에는 폴란드 동부에 위치한 루블린에서 ‘곰브로비츠 연극제’가 그 화려한 막을 올릴 예정이다.

최성은(동유럽 발칸연구소 전임연구원, 폴란드 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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