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에 만난 늦사랑, 그림책

꿈을 위해 출판사 차려

“그림책으로 사랑 전하겠습니다”

 

“잘할 때가 안 됐는데 잘하려는 것은 욕심이에요. 오늘 하는 것을 즐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많이 하면 저절로 잘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잘할 때가 안 됐는데 잘하려는 것은 욕심이에요. 오늘 하는 것을 즐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많이 하면 저절로 잘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칭 아동문학의 한류스타, 이루리 작가입니다.” ‘이루리’라는 필명을 쓰는 정용후(독어독문학과 88학번) 작가는 그림책 덕후다. 그림책을 쓰고 편집하고 번역한다. 서평을 쓰고 대학에서 그림책을 가르치기도 한다. 쌀쌀한 가을날, 그가 운영하는 그림책 전문 서점 이루리북스에서 그의 그림책 사랑을 느껴봤다.

 

  마음의 생명을 구하리

  이루리 작가는 어린 시절 사람을 살리는 일에 매력을 느껴 의사가 되고 싶었지만 어려운 형편에 꿈을 접었다. “의대에 가지 않고 사람을 살릴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고민했어요. 책을 읽으면서 몸의 생명이 아닌 마음의 생명을 살리는 작가가 돼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소설가를 꿈꾸며 진학한 대학, 학비를 벌기 위해 그는 입학식 날부터 과외와 논술 수업을 시작했다. 글을 쓰는 것도 놓지 않았다. 시간이 날 때마다 글을 쓰고 문학 동아리 ‘진보문학회’에서 활동했다. ‘이루리’라는 필명도 이때 정해졌다. “당시에는 한자로 호(號)를 짓는 게 유행이었는데 저는 유난히 순우리말을 좋아해서 우리말로 필명을 정하고 싶었어요. 이름이 불릴 때마다 세상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죠.” 그렇게 그가 지은 필명은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꿈을 이루리’였다. “이름이 길어 비웃음을 좀 샀죠. 너무 길어서 맨 끝에 있는 세글자 ‘이루리’가 필명으로 굳어졌어요.”

  그는 유난히 소설과는 연이 없었다. “제가 어떤 팀에만 들어가면 희한하게 예선은 통과해도 본선에서 다 떨어졌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인연이 아니었을 수도 있죠.” 소설 외에도 드라마 대본, 연극 극본, 르포 등 다양한 글을 썼지만 결실을 보지는 못했다. 졸업 후 글쓰기에 허무함을 느꼈을 즈음 우연히 ‘창작 연습’을 강의했던 송하춘(문과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를 만났다. “너 요즘 글 안 쓰고 뭐 하고 다니니.” 송 교수가 그를 만나자마자 던진 한마디에 그는 다시 마음을 다잡았다. “강의를 수강할 당시 선생님께서 제가 쓴 소설을 재밌게 봐주시고 신춘문예에 내기도 했어요. 선생님께서 당연히 저를 기억 못하실 거라 생각했는데 그 한마디가 굉장히 부끄러우면서도 용기가 됐죠.”

 

  30년 만에 처음 읽어본 그림책

  서른이 된 1998년, 그는 선배로부터 본교 사회교육원에서 논술 강좌를 맡아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대입논술을 가르치는 강좌인 줄 알았지만, 이루리 작가가 맡게 된 강좌는 아동독서지도사 양성과정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책을 접할 기회가 적었던 그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그림책을 읽었다.

  처음 읽은 그림책은 윤회를 바탕으로 한 린드그렌의 <사자왕 형제의 모험>이었다. “형제가 주인공인데 작품이 시작하자마자 형제가 다 죽어요. 다음 생에 형제가 만나 모험하는 내용인데, 형이 부상을 당해서 또 죽을 위기에 처해요. 그다음 생에 만나기 위해 낭떠러지에서 형제가 떨어지면서 이야기가 마무리돼요.” 그림책은 애들 책이라 생각했던 이루리 작가에게 <사자왕 형제의 모험>은 큰 충격이었다. 그는 다른 그림책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서점에 진열된 그림책들을 봤는데 애들이 봐서는 안 되는 책이 너무 많았어요. 무거운 주제를 다루거나 심지어는 반사회적인 작품들도 있었죠.” 여러 그림책을 찾아보고 공부하며 그는 그림책 역시 영화나 연극처럼 독립된 예술 장르라는 것을 알게 됐다. 그렇게 그림책과의 늦사랑이 시작됐다.

  “그림책의 매력이요? 레오 리오니의 <프레드릭>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들쥐 프레드릭은 겨울을 위해 햇살을 모은다며 다른 쥐들과 달리 곡식을 모으지 않는다. 겨울이 길어져 곡식이 동나자 프레드릭이 햇살과 색깔을 이야기했고, 들쥐들은 몸이 따뜻해져 겨울을 버틸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저는 이 작품만큼 예술가와 예술의 의미를 짧고, 쉽고, 아름답고, 깊게 보여주는 작품을 다른 어떤 장르에서도 본 적이 없어요. 지금도 제가 그림책을 쓸 때 원칙은 같습니다. 얼마나 쉽고 재미있고 아름답게 만들 것인가.”

 

  그림 그리는 것만 빼고 다 합니다

  “그림책을 만나기 전에는 제가 소설을 제일 좋아하는 줄 알았어요. 그래서 소설, 희곡, 시나리오 안에서 쳇바퀴 돌듯이 있던 거죠. 하지만 그림책을 만나고 제가 소설가를 꿈꿨던 것을 잊어버릴 만큼 그림책이 좋았어요.” 이루리 작가는 그림책의 매력을 친구들에게 소개했지만, 반응은 차가웠다. 시킨 사람도 없었지만 그림책을 알리고 싶은 마음에 그림책 서평을 써서 한겨레 신문사에 보냈다. “인터넷 한겨레에 그림책 서평을 연재하면서 본격적인 그림책 덕질을 시작한 거죠.” 이후로도 서평을 주기적으로 써서 서평집을 3권이나 냈다. 그림책을 공부하던 중 출판사 어린이책 팀장을 맡고 있던 선배의 제안으로 번역도 시작했다. 2003년 동화 <지구를 구한 꿈틀이 사우루스>를 번역하며 번역가로 데뷔했다. 그는 지금까지도 동화와 그림책 번역 작업을 이어 나가고 있다.

  이루리 작가는 그림책 작가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도서출판 북극곰의 편집장이기도 하다. 2014년부터 그림책 전문 서점 ‘이루리북스’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그림 그리는 것만 빼고 사실상 그림책과 관련된 모든 일을 한다. “그림은 절대적인 시간 투자가 필요한 작업이에요. 그림 그리는 일도 재밌을 텐데 그림을 그리면 나머지를 못 할 것 같아요.”

  이루리 작가는 그림 작가들과 협력해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작가들의 창작에 도움 주는 것의 즐거움을 안 후부터는 신인 작가나 지망생을 대상으로 워크샵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에는 세종사이버대 문예창작과 교수도 겸임하고 있다. 수업에서 그는 잘하려는 생각을 버리는 것을 강조한다. “잘할 때가 안 됐는데 잘하려는 것은 욕심이에요. 오늘 하는 것을 즐기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꾸준히 많이 하면 저절로 잘하게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극곰과 함께 한류스타로

  책을 쓰고 싶던 이루리 작가는 번역가를 꿈꿨던 아내와 만나 2009년 도서출판 ‘북극곰’을 만들었다. “지난 40년은 남들 눈치 보면서 살았지만, 남은 40년은 우리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자며 둘 다 회사를 그만뒀습니다. 신혼집에 출판사를 등록해 작업을 시작했어요.” 어릴 적부터 북극곰을 좋아해 출판사 이름은 자연스럽게 북극곰이 됐다. 출판사를 차린 지 1년 뒤인 2010년에 첫 책 <북극곰 코다>를 냈다. “출판사 이름이 북극곰인데 북극곰 관련된 이야기가 없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죠.” 북극곰에 관한 이야기를 써야겠다는 생각은 있었지만, 글이 잘 써지지는 않았다. “어느 날 꿈에 아기 곰이 엄마 곰의 코를 가려주는 장면이 나왔어요. 순간 온몸에 닭살이 돋으면서 벌떡 일어나서 글을 썼어요.”

  40번 이상 퇴고를 거친 후 나온 책 <북극곰 코다>는 인기를 끌었다. 문화체육관광부 우수교양도서로 지정되기도 했다. 책의 흥행에 용기를 얻어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에 부스를 운영했다. “책을 꺼내서 끝까지 본 사람이 딱 세 명이 있었고, 그 세 명이 다 책을 계약하고 싶다고 했어요.” 그렇게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등 11개 나라에서 번역됐다. 이어서 <언제나 네 곁에>, <천사 안젤라> 등 여러 책이 세계 각국으로 수출됐다. 이루리 작가가 자신을 ‘자칭 아동문학계의 한류스타’로 소개하는 것이 단순한 농담은 아니다.

  이탈리아 작가 베르토시와의 인연도 볼로냐 도서전에서 시작했다. <북극곰 코다>를 읽고 감동한 라우렌 작가에게 이루리 작가는 책을 선물했다. 그날 오후, 라우렌 작가는 남편 베르토시와 부스를 다시 찾았고, 베르토시는 자신의 그림책 <눈 오는 날>을 답례로 선물했다. “베르토시의 그림을 보는 순간 깜짝 놀랐어요. 바로 제가 찾고 있던 그림이었죠. 독특하고 따뜻하며 아름답고 환상적이었습니다.” 마침 함께 작업했던 그림작가가 그만두게 돼 연작 그림책을 함께 할 그림 작가를 구해야 했다. 베르토시에게 <북극곰 코다 두번째 이야기, 호>의 원고를 보내자 그는 흔쾌히 함께 작업하겠다는 뜻을 전했다. 둘의 협업은 계속됐다. 북극곰 출판사에서 베르토시의 작품들을 번역해 국내에 출판했고, 베르토시의 그림으로 이루리 작가의 첫 책 <북극곰 코다>는 <까만 코다>로 다시 태어났다.

 

  이루리 작가는 그림책을 염두하고 글을 쓰지만, 꼭 그림책이여야 한다는 한계를 정하고 쓰고 싶지는 않다고 말한다. 글을 발전시켜 동화책으로 내고 싶은 작품도 있고, 소설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도 있다. “연극이나 애니메이션 하시는 분들과도 협업하고 싶어요. 디즈니나 픽사 같은 콘텐츠 회사처럼 출판부터 모든 과정을 아우르고 싶어요.” 그는 그림책의 힘을 믿는다. “웹툰으로 드라마나 영화를 만들 듯, 그림책이라는 오리지널 콘텐츠도 충분히 재가공할 수 있는 재미나 아름다움이 있어요. 그림책 시장을 성장시키고 싶습니다.”

  이루리 작가는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책으로 세상에 사랑을 전하고 있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고 사랑받기 위해서라고 생각해요. 부디 후회 없이 행복하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기를 바랍니다.”

 

글 | 조형준 기자 jun@

사진 | 문원준 기자 mondlic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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