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가 도읍지가 될 만한 곳이다. 더구나 뱃길이 통하고 나라 안의 거리도 알맞으니 편리하다”

이성계가 수도를 정하던 중 남경의 궁터(서울)를 돌아보면서 한 말이라 전해진다. 조선의 건국과 함께 수도로서의 서울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조에 형성된 서울은 현재와 상이한 모습이었다. 현대와 비슷한 형태의 서울로의 변화는 개항기 일본인의 거주로 인해 시작됐다. 경제권을 쥐고 있던 일본인들이 청계천 이남에 모여 살면서 남촌 지역은 새로운 경제의 중심지가 됐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 종로 지역은 정칟 행정의 중심지로, 중구 지역은 상업의 중심으로 등장했다. 또, 용산 지역은 일본군의 주둔으로 인해 군사 중심으로 바뀌었다. 1934년 일제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을 실시하면서 1944년까지 영등포, 돈암지구 등 10개 지구의 서울 외곽 지역이 개발됐다.

서울의 신시가지 개발은 광복 후 본격적으로 추진됐다. 광복 후 많은 인구가 유입되고 전쟁으로 주택이 파괴된 가운데 서울시의 택지수요 부족은 1960년대까지 이어져 이 시기에 토지구역정리사업이 활발하게 이뤄졌다.

1970년대에는 대규모 단지 개발이 시작됐다. 그 대표적인 예로 여의도 개발은 서울이 단핵도시에서 인천, 안양, 수원등과 연계된 거대도시로 바뀌려는 추세 속에서 시작된 것으로 기존 도심의 기능을 보완하는 하나의 부도심 역할을 갖는 것으로 계획됐다. 이와 함께 서울의 가장 현대적인 모 습으로 일컬어지는 강남 역시 1970년대 대표적 개발의 하나다.

올림픽 개최도시로서 개발촉진 계획을 강화했던 1980년대의 서울시는 토지 고갈로 인해 안양천변의 목동지역 개발에 주력하게 된다. 또한 한강 개발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한강종합개발계획 아래 저수로 정비, 한강둔치 조성 및 강변도시고속도로 건설이 이뤄졌다. 1980년대 말에 들어서면서 서울의 상황은 더욱 심화된 주택부족과 도시 내 토지고갈로 인해 개발제한구역 바깥으로 인구가 넘치기 시작했다. 이에 평촌, 산본, 중동지구와 일산, 분당지구 등 수도권내 5개 신도시가 건설됐다.

1995년부터 민선자치시대를 맞이한 서울은 사회복지· 공원녹지 등의 비중을 확대시키며 질적 확충을 도모하게 된다.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서울시는 새천년 미래 비전에 관한 새로운 도시상의 창출을 요구받게 됐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도시의 제반 문제를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커지고 있는 것이다.

이정중 도시계획상임위원은 서울의 미래에 대해 “지속가능한 개발을 통한 환경친화적인 서울을 구상하고 있다”며 현재 진행 중인 청계천 복원과 지역균형개발사업을 일례로 꼽았다.

정도 600년. 서울은 이제 과거의 역사를 넘어 새로운 도시로 태어나기 위한 시험대에 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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