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수정 영화평론가
                                                홍수정 영화평론가

 

  지금 극장가에서 가장 사랑받는 외화 두 편을 고르자면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와 <플라워 킬링 문>일 것이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반가운 은퇴 번복을 거쳐 탄생한 작품과, 이제는 장르가 되어버린 그 이름 ‘마틴 스코세이지’의 최근작이다. 일본과 미국만큼이나 거리가 먼 것 같은 두 편의 영화. 그러나 이들 사이에는 은밀한 공통점이 흐른다. 이들을 하나로 묶는 연결점을 짚으며 글을 시작하려 한다.

  두 영화는 과거로 회귀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본으로, <플라워 킬링 문>은 오일 붐이 불었던 1920년대의 오세이지로. 수십 년 전의 그곳에서 영화는 시치미를 뚝 떼고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래의 내용에는 스포일링이 있으므로 유의해 읽어주기를 바란다.

  이 영화들은 어째서 과거로 갔을까? 그 이유를 알려면 영화들이 택한 시기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플라워 킬링 문>은 서부 개척자들이 오클라호마에 있는 오세이지 인디언 보호구역에 하나둘 몰려들던 때에 집중한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나는 부의 음험한 이동을 통해 마틴 스코세이지는 미국 역사의 근간을 되짚는다. ‘오세이지족 연쇄살인 사건’으로 대표되는 미국 역사의 어두운 단면을 말이다. “기억해야 해. 지금의 부는 누군가의 피 위에서 축적됐음을.” 마틴 스코세이지는 말한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도 과거를 찾는다. 태평양 전쟁을 배경으로 한 이유와 관련해, 이 영화는 많은 오해를 받고 있다. 전범국 일본을 옹호한다거나, 패전국의 슬픔에 취해있다는 오해. 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전쟁 중의 일본으로 되돌아가, 자기 세계의 근간을 고백한다.

  영화에서 ‘마히토’는 큰할아버지의 뜻을 이을 적자다. 여기서 ‘큰할아버지’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마히토’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남긴 유산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마히토는 군수 공장 사장인 아버지 덕에 풍족한 생활을 한다. 영화는 지금 일본이라는 나라가 전쟁의 토대 위에 세워졌으며, 지브리의 작품들 역시 일본이라는 따듯한 요람 안에서 성장했음을 고백한다. 이때 미야자키 하야오는 일본이 짊어진 죄의식을 공유한다. 그의 태도는 영화에 등장하는 ‘앵무새 군단’을 통해서도 가늠할 수 있다.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며 세력을 넓히는 이들의 모습에서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의식이 엿보인다.

  두 영화의 마지막 공통점. 이 점이 가장 중요하다. 이들은 기껏 돌아간 과거에서 무너져 내린다. <플라워 킬링 문>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한 헤일(로버트 드 니로)은 재판정에 선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큰할아버지는 세상을 떠난다. 신비롭고도 영롱했던 탑은 허물어진다. 영화들은 마지막에 이르러 과거의 영광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한다. “하나의 시대가 끝이 났어.” 그들은 말한다. 그러나 두 작품 모두에서 마지막에 이르러 자식 세대가 살아남음을 상기해 보자. 마히토, 그리고 어니스트와 몰리의 자식들. 이들은 이제 공터 위에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2023년의 막바지, 우리를 찾아온 두 편의 영화가 있다. 이들은 누군가의 피로 시작된 과거를 고백하고, 화려했던 한때를 보여주었다가, 결국 무너져 내린다. 이들이 어째서 자꾸만 세계의 시작을 반추하고 이별을 고하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우리 시대의 두 거장이 동시에 같은 말을 전하는 것은 어쩐지 가슴 뭉클하다. 하나의 시대가 두 편의 작품을 통해 저물었다.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시작점에 서 있다.

 

홍수정 영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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