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아버지보다 산을 더 빨리 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아버지는 선천적으로 튼튼한 신체를 타고 나셨다. 건강검진을 받으러 갈 때를 빼곤 병원에 가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 아버지의 발걸음이 갑자기 이상해졌다.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갔는데, 왼쪽 고관절 뼈와 다리뼈가 만나는 부위가 닳아져 있었다. 곧바로 인공고관절 치환수술을 받으셨다. 퇴원 후 평소처럼 아버지는 앞장을 서시고 어머니는 뒤를 따라 걸으셨다.

  나는 “다행이다”고 안심했다. 몇 개월 뒤 아버지가 무거운 기름통을 옮기며 무리를 하시다가 결국 척추협착증이 심해졌다. 이어 골목길에서 넘어져 손가락뼈가 골절되기도 했다. 지난 4년 동안 네 차례 수술을 받고 퇴원하셨다.

  나는 겁이 나기 시작했다. 평소 지인의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땐 무덤덤했는데, 어쩌면 아버지가 병실의 침대 위에서 삶을 마감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모님께 효도다운 효도를 해드리지 못한 자식이란 생각에 눈물이 났다.

  내가 20대에 꿈꿨던 것과 다르게 불혹의 나이에 다다른 내 인생은 골목길처럼 좁아짐을 느낀다. 그러나 길이 좁아졌다고 생각의 양이 적어지진 않는다. 깔때기처럼 길이 좁아질수록 생각은 압축되고 요약된다.

  돌이켜 보면 고속도로를 달리던 시절에는 그냥 막연히 먼 길을 간다고 생각했다. 가끔 휴게소에 들리거나 사고로 세워진 차, 나를 앞지르는 차들만 봤을 뿐이다. 이제는 막다른 골목길에 들어서 멈춰선 사람도, 골목의 담을 뛰어넘는 사람도, 재빨리 골목을 빠져나와 큰길로 들어서는 사람도 보인다.

  삶이 힘들 때면 부모님이 생각난다. 시인 함민복은 ‘성선설’이란 시에서 “손가락이 열 개인 것은 / 어머님 뱃속에서 몇 달 은혜 입나 기억하려는 / 태아의 노력 때문인지도 모릅니다”라고 했다. 우리 어머니도 “어려울 때일수록 새끼들을 생각하면 열심히 살 궁리를 할 수밖에 없다”고 회상하신다.

  팍팍한 현실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나와 동생을 생각하며 더욱 악착같이 버티어 오셨으리라. 지난주 지인들의 부친상 부고를 두 차례나 받았다. 분명 그분들도 자식을 생각하며 온갖 시련을 이겨내셨을 것이다.

  우리도 고아가 된다. 어떤 이는 청년기에 또 어떤 이는 장년기에 또 어떤 이는 노년기에 고아가 된다. 혹시 부모님의 은혜를 잠시 망각했다면 이제라도 열심히 살아갈 것을 다짐하자. 그것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의 최선일 것이다.

 

<不純分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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