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책 돌려보다 들켜 탈북

유튜브·연설로 북한 실상 알려

“고려대 동기 덕에 한국 적응해”

 

지난 10일 김금혁 교우가 졸업 3년만에 캠퍼스를 찾았다. 그는 “고려대학교는 정해진 운명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며 “고려대 입학 후 안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김금혁 교우가 졸업 3년만에 캠퍼스를 찾았다. 그는 “고려대학교는 정해진 운명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며 “고려대 입학 후 안정을 되찾았다”고 말했다.

 

  ‘알아주세요, 북조선에 이런 아이가 있다는 것을.’ 

  2011년 어느 날 한 일간지 기자에게 이메일 한 통이 왔다. 발신자는 자신을 다만 ‘북한사람’이라 소개했다. 투박한 문체는 북한 어법 그대로였다. ‘왜 우리는 이러게 살아야 할가요? 조물주는 왜 우리를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내보냈을가요?’ 메일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비판과 한탄으로 가득했다. ‘우리가 먼저 기발을 들고 나가야 다른사람들이 따라옵니다. (중략) 저는 지금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신분입니다.’

 

  마음을 움직인 탈북민이란 존재

  김금혁(정치외교학과 13학번) 교우는 1991년 12월 평양시 중구역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북한 노동당 간부, 아버지는 북중 국경에서 사업을 했다. 그는 김일성종합대학 영문과에 다니던 2010년 1월 베이징어언대학으로 사비 유학을 떠났다. 김일성대 교복은 벗었지만, 충성심은 투철했다. 그해 3월 말 천안함 피격 사건을 놓고 한국 교환학생과 6시간을 싸웠다. “동국대 북한학과에서 온 친구는 이미 군대를 다녀온 모양이었어요. 전 ‘우리가 했다는 증거가 어디 있느냐’며 따졌죠.” 며칠 뒤 그 학생은 화해 차 술자리를 제안했다. 술자리에서도 대화 주제는 ‘북한’이었다. 한국 학생은 ‘탈북민’에 대해 말했다. “잘 살았네. 탈북민 얘기 들어보니 되게 어렵게 살았다더라.”

  그날 술자리는 일찍 파했다. 숙소에 돌아와 네이버 검색창에 ‘북한’을 쳤다. 충격이었다. 그날부터 북한 관련 뉴스, 책, 다큐를 꼬박꼬박 챙겨봤다. 2010년 12월엔 북한 유학생 4명을 모아 독서회도 꾸렸다. <자유론>, <국가론>, <황장엽 회고록>을 돌려 읽었다. 세상을 바꾸려면 지식이 필요했다. 목표는 김정일을 몰아내고 시장경제 시스템을 도입해 ‘남조선’과 통일을 논하는 것.

  독서회 활동 1년째 된 2011년 12월 김정일이 죽었다. 보위부는 유학생 파견 지역에 감시원을 풀었다. 톈진 난카이대학 친구가 북송됐다. 숙소에 급습한 보위부원은 친구 가방에서 <국가론>을 발견했다. 한국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북한에선 금서였다. 돌려 읽던 그 책엔 독서회원들이 남긴 필적이 있었다. 친구 부모님께 전화가 왔다. “너네 혹시 이상한 짓 했니?” 김 교우는 등골이 서늘했다. 2012년 2월 8일, 베이징 주재 북한 대사관에서도 전화가 걸려 왔다. “비자 문제가 있으니 대사관에서 얘기 좀 하자.” 2주 전에 비자를 연장한 참이었다. 불안감이 엄습했다. 그 자리에서 휴대폰을 꺾었다. 스웨터와 바지, 노트북을 작은 캐리어에 쑤셔 넣고 기숙사를 나섰다. 어머니 사진과 편지를 서랍에 두고 왔다.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정 오고 싶으면 대사관 담을 넘으라”

  김 교우는 한 PC방에 숨어 한국 대사관에 전화했다. 대사관 직원은 “중국 공안이 당신을 뒤쫓고 있어 도울 수 없다”며 “정 오고 싶으면 대사관 담을 넘으라”고 했다. UN에 미국 망명을 요청했지만 희망자가 많아 3개월을 기다려야 했다. 주머니에 돈이 없었다. 며칠이나 버틸 수 있을지 감이 안 왔다. 편의점에서 면도칼을 샀다. 잡히면 손목을 그을 작정이었다.

  한국인이면 누구든 만나야 했다. 그는 베이징 왕징 한인타운을 찾았다. 배가 고파 눈앞에 보이는 ‘피자헛’에 들어가 앉았다. 앞 앞 테이블에 한국말로 대화하는 2명이 앉아 있었다. 김 교우는 벌떡 일어나 평양 말투로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저 김금혁이라고 합니다. 평양에서 왔습니다. 한국 가고 싶은데 도움 줄 수 있습니까?”

  상대는 크게 웃었다. “내가 누군 줄 알고 그런 도움을 청하나?” “다른 건 모르겠고 한국인인 건 알겠습니다. 같은 인간으로서 인지상정으로 도와줄 수 있다고 봅니다.” 옆에 앉은 다른 한 명이 말했다. “자네 잠깐 기다려줄 수 있겠나?” “선생님, 지금 보위부가 뒤쫓고 있습니다. 여기 있으면 들킵니다.” “따라오게.”

  따라간 곳은 한 교회 사무실이었다. 목사는 침구류를 마련해 주고는 문을 잠그고 나갔다. “잘못 걸린 줄 알았죠.” 김 교우는 둔기를 찾으려 사무실을 뒤졌다. 목사는 3시간 뒤 사업가로 보이는 아저씨 한 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아저씨는 그에게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염색하라”고 주문했다. 빨간 유니클로 후드티와 도수 없는 뿔테 안경도 건넸다. 노란 머리의 김 교우는 현지인처럼 보였다.

  그는 장소를 옮겨 가며 국정원에게 조사받았다. 조사 도중 대한민국 여권이 나왔다. 이제 김 교우는 서울 모 대학 출신 교환학생이 됐다. 한 달에 걸친 조사가 끝난 2012년 3월 27일, 요원들은 김 교우를 택시에 태워 베이징 서우두공항으로 데려갔다.

  오전 11시쯤 차에서 내린 김 교우는 여전히 노란 머리에 뿔테 안경, 빨간 후드티였다. 홀로 배낭을 멘 채 캐리어를 끌었다. “잡힐까 봐 무서웠습니다. 탑승 전 4시간을 화장실에 숨어 있다가, 에스컬레이터 옆 의자에 쪼그려 앉다가 하면서 계속 돌아다녔죠.” 용기를 내 심사대로 향했다. 누군가 빨간 후드티를 살짝 잡아당겼다. 여행객 무리 선두에서 깃발을 든 여성이었다. 여성은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했다. 

  김 교우는 출국 게이트 앞에서 여권을 든 손을 벌벌 떨었다. 인천으로 가는 대한항공 비행기였다. 탑승구에서 승무원이 배꼽 인사를 했다. 다리 힘이 풀렸다. 그는 비행기 좌석에 앉아 가는 내내 펑펑 울었다.

 

  600만원으로 시작한 한국 생활

  오후 7시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입국 직후 짐 검사를 받았다. 그때 걷어간 노트북은 다시 받지 못했다. “지금 생각하면 억울해요. 요원들이 실수로 잃어버린 것 같은데, 그 안엔 탈북 전 찍은 사진이 많았거든요.”

  그가 입국 후 대한민국 사회로 나온 건 2012년 9월 7일. 손에 쥔 건 일시금으로 받은 정착 지원금 300만원뿐이었다. 나머지 300만원은 분기별로 100만원씩 받을 예정이었다. “300만원으로 모든 걸 시작해야 했죠. 제일 먼저 컴퓨터를 샀고, 중고 샵에 가서 10~20년 된 가전제품을 마련했어요.” 9월 8일엔 ‘알바천국’으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예식장 알바부터 시작했다. 김 교우는 매 주말 뷔페 안을 돌며 접시 나르기를 반복했다. 접시를 주방에 반납하면 또 새 접시를 세팅했다. 일당은 8만원에서 10만원 정도였다. 평일엔 명동 편의점에서 일했다. 담배를 피운 적이 없는 김 교우는 손님이 부르는 담배 약어를 알아듣기 어려웠다. 단역배우로도 뛰었다. “사극 <마의>에 ‘마구간을 지나가는 상인 1’ 역할로 0.5초 출연했어요. 잠깐 나왔지만 대기 시간은 10시간이 넘었죠.”

  김 교우가 아르바이트를 전전한 이유 중 하나는 대학 입학이었다. 원서는 두 장만 썼다. “북에 있을 때 알던 남한 대학교는 고려대와 서울대뿐이었습니다.” 서울대 수시전형은 수능 최저 등급을 요구했다.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기에 두 달은 짧았다. “서울대가 요구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고려대엔 ‘북한 이탈주민 특별전형’이 있더라고요. 영어 자기소개서와 토익 점수를 준비했죠.” 그렇게 2013년 고려대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학비는 국가가 댔어도 생활비는 직접 벌었다. 도봉구 자취방에 자리 잡고 홀로 지냈다. 학기 중엔 단기 중국어 과외, 방학 땐 창동 중국어 학원에서 학생에게 강의 자료를 나눠줬다. 김 교우는 함께 내려온 가족이 없다. “명절 때면 가족 생각이 많이 나요. 내려온 지 얼마 안 된 시점엔 더 외로웠습니다.” 두고 온 가족 소식은 전혀 들은 바가 없다.

 

  탈북민에서 ‘고려대 13학번’으로

  김 교우는 2013년 1학기 ‘사고와 표현’ 첫 수업 시간을 기억한다. 한 명씩 돌아가며 자기소개를 했다. 그는 “북한 평양에서 온 김금혁입니다”라는 문장으로 운을 떼고 탈북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말을 마칠 때쯤 동기 2명이 눈물을 흘렸어요.” 마음을 연 동기들은 김 교우를 외롭게 두지 않았다. 명절에도 도봉구 자취방을 채웠다. “동기들 덕분에 적응이 빨랐어요. 그 5명은 지금도 친하게 지내요.” 

  김금혁 교우는 자신이 떠나온 곳에 관심을 가졌다. 유튜브 ‘김금혁의 난세일기’를 열고 북한 실상을 알리고 있다. 2019년 10월엔 영국 런던에서 열린 ‘OneYoungWorld 2019’에선 북한 주민을 대표해 연설했다. “북한 정권은 우리 가족을 볼모로 삼고 내게 침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엄마, 아빠, 너무너무 죄송합니다. 그러나 이 아들은 여기서 멈출 수 없습니다.”

  그는 2020년 비대면 강의를 듣다 졸업했다. 지난 5월엔 김 교우와 아내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났다. 태명은 ‘햇살’이었다. ‘누구 하나 차별하지 않고’ 모든 이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다.

  김금혁 교우는 탈북으로 삶을 바꿨다. “삶을 바꾸는 데는 큰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도전을 권합니다. 내 삶을 살아주는 이는 사회가 아닌 나 자신이니까요.” 김일성대를 다니던 그에게 고려대학교는 정해진 운명 안에선 상상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이제 그는 자신을 ‘탈북민 김금혁’ 대신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 13학번 김금혁’으로 소개한다.

 

글 | 정세연 취재부장 yonseij@

사진 | 염가은 사진부장 7rr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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