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땅에서 시작한 미국 이민

  52년 만에 다시 시작한 대학 생활

  “길을 벗어나는 것이 삶”

 

지난달 18일 변문수 교우가 미국에서 날아온 가족들과 함께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지난달 18일 변문수 교우가 미국에서 날아온 가족들과 함께 환하게 미소 짓고 있다

 

  손주들 손을 잡고 졸업 사진을 찍는 대학생이 있다. 시카고 친구들에게는 ‘순 깡이다’며 농담 섞인 응원을 받고, 같이 공부한 후배들에게는 ‘신기하다’, ‘존경스럽다’며 격려받는 변문수(철학과 68학번) 교우는 1968년 입학해 지난 2월 졸업을 맞았다.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건너간 변 교우는 대학 울타리 안과 다른 세계를 경험했고, 고려대로 돌아온 이후에는 기억과 달라진 학교를 마주했다. 인생 여정 속에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아온 그는 길을 찾아 헤매는 후배들에게 응원을 건넨다.

 

  젊음을 딛고 미국으로

  어렸을 때부터 삶이란 무엇인가를 곱씹던 변문수 교우는 젊은 시절 방황하던 모습 그대로 고려대 철학과에 입학했다. 신앙생활에 충실하고 사진 찍기를 취미 삼았던 그는 공부보다 동아리에서 노는 것에 조예가 깊었다. “사진부와 기도 학생회를 했었죠. 1969년에 사진부 사람들과 동해안에 갔을 때 해일을 만나 머물던 곳이 물바다가 됐던 기억, 험프리 미국 부통령이 고려대 본관을 방문했을 때 사진을 찍던 제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미국 이민이 예정돼 있었기에 오히려 자유로운 대학 생활을 누렸다. “미지의 세계에 가면서 그곳에서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한 꿈까지 상상할 수는 없었습니다. 가면 젊음으로 어떻게든 되겠지 생각했죠.” 군인 신분으로 미국에서 유학한 그의 아버지는 한국에서의 과업을 마친 다음 미국에서 살기를 희망했다. 변문수 교우는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군에 복무한 뒤, 누나와 매형이 먼저 터를 닦아놓은 아르헨티나로 떠났다.

  이민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과테말라까지 올라간 다음, 미국을 경유해 캐나다로 가는 비자를 받고 나서야 겨우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한국을 뜬 지 1년 만이었다. 1973년 5월 미국 시카고에 도착했지만, 그는 신분 문제도, 경제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은 이민자였다. “닥치는 대로 일했어요. 공장에서 하루 16시간씩 자동차 부품을 만들고 식당에서 그릇을 닦거나 요리도 했죠. 이민국에서 조사를 나오면 공장 철판 밑에 숨었습니다. 그게 이민 간 사람들이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어요. 젊었기에 고생은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의 삶은 배우자를 만나며 안정을 찾는다. 간호사로 일하던 사남순 씨를 만난 것은 1978년의 일이다. “시카고에 한국인도 많이 없을 때인데, 두 다리 건너 소개 받아 천생연분으로 만났어요.” 두 딸을 낳았고, 경제 사정도 조금씩 나아졌다. 식당 접시 닦이로 시작한 그는 앞치마를 매고 햄버거를 구웠고 매니저 명찰도 달았다. 이후 샌드위치 가게를 인수해 운영하던 중 고려대 경영대학원 출신 손님에게 보험사 일을 권유받았다. 우연히 입사했지만 32년을 일한 뒤 2017년 은퇴했다. 도중에 귀여운 손주도 4명이나 얻었다.

 

  새로운 도전, 70대 대학생으로

  변문수 교우는 2018년 사남순 씨를 뇌암으로 떠나보내며 삶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수술을 다섯 번 받았는데 1년 정도 병원 생활을 하다가 세상을 떠났어요. 첫해에는 매일 유골함만 허망하게 보고 왔습니다. 2년째는 일주일에 다섯 번 정도, 3년째는 일주일에 세 번 정도 갔죠. 그렇게 세월이 흐르는데 계속 이렇게 살 수만은 없겠더라고요.” 2022년 봄에 귀국한 그는 격리가 끝나자마자 문과대학 행정실을 찾았다. “외국에서 오래 생활하다가 이제 다시 대학에 들어오고 싶은데,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렇게 2022년 가을학기 고려대 철학과에 재입학했다. “한국을 떠나면서 담당 선생님께 언제까지 복학해야 하냐 물었는데, ‘언제든지 준비되시면 오세요’라고 하셨어요. 그 얘기를 평생 머리에 지니고 있었는데, 52년이 걸렸네요.”

  젊은 후배들 사이에 껴서 대학에 다니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수강 신청부터 벽을 마주했다. 학적은 1학년으로 돌아가 있었고, 첫 학기에 세 과목밖에 들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방법을 몰라 블랙보드 출석 확인도 놓쳤다. 간신히 강의를 듣더라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75분을 꽉 채워서 강의하는 교수님들을 보면서 ‘조금 일찍 끝내주지’ 하는 야속한 생각이 든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는 공책을 펼치고 강의 내용을 그저 써 내려갔다. 공책은 과목당 2권씩을 채웠고 3권을 훌쩍 넘길 때도 많았다. 공책은 고려대에서 수학하는 동안 어떤 강의를 듣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정리한 그만의 기록 모음집이다. 모르는 게 생기면 딸뻘 교수에게 묻고 또 물었다. “교수님들은 저를 선배님, 선생님이라고 불러요. 하지만 저는 교수님들을 절대 후배라고 부르지 않고 교수님이라고 불러요. 나이가 어려도 존경하고 존중할 수밖에 없어요.” 다시 시작한 공부는 그 자체로 즐거움이었다. “공부하면 지식을 얻고, 지식은 지혜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습득 과정이 공부의 즐거움이구나 생각했죠.”

  대학 생활 2막, 동아리도 다시 찾았다. “같은 교실에 앉아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개인적으로 만나 밥 먹고 얘기하는 것도 너무 즐거웠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대학원에 가면 좋을 것 같은 학생도 있고, 서로 연인으로 소개해 주고 싶은 친구들도 있었어요.” 대동제 철학과 주점에 앉아 공연도 구경하고 고려대 서화회에서 서예를 배워 지난해 12월 열린 정기미전에 출품하기도 했다. “후배들과 같이 밥 먹고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 너무 감사하고 고마웠어요. 70세 생일 다음 날 집사람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막막했습니다. 이번 졸업으로 80세 생일을 맞았을 때 돌아보며 기억할 만한 성취가 생겼네요.”

 

  이기적인 삶, 할 만큼 해보자

  그는 후배들에게 세 가지 ‘이기적인 삶’을 살라고 조언한다. 첫 단계는 스스로 원하는 바를 하는 데서 시작한다. “태어났다면 자유롭게 마음 가는 대로 사는 거죠.” 두 번째 이기적인 삶은 역설적으로 남들과 함께함으로써 완성된다. “내 것만 찾는 게 아니고, 어려운 이웃을 찾아가서 위로하고 이해하는 삶이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타적이지만, 도움을 주면 스스로 행복한 마음이 생겨난다는 점에서 이기적인 삶이라고 얘기하고 싶어요.” 마지막으로 본인만의 지식, 지혜, 믿음을 간직하는 삶을 강조한다. “내가 죽을 때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지식, 지혜, 믿음뿐이에요. 이걸 내 마음속에 갖고 있는 것이 가장 이기적인 삶이라고 봅니다.”

  변문수 교우는 자신의 인생을 ‘안개 속을 헤치고, 길을 벗어나 헤매기도 했던 삶’이라 표현했다. “제 인생은 봄날 아침 안개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어요. 우리 후배들도 그런 기분일 겁니다. 안개는 오래 끼어 있지 않습니다. 해만 뜨면 완전히 없어지고, 앞에 길이 보이죠.” 진로를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응원도 전했다. “CPA 시험 준비든, 대학원 진학이든 할 수 있는 만큼 노력해 보세요. 그러다가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죠.” 후배들과 함께한 대학 생활은 자부심 가득한 기억이다. “재입학은 제 인생에서 중요한 결정이었어요. 젊은 사람들 틈에서 공부하는 것은 엄청난 도전이었고 상당히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시작한 공부를 마침내 해냈습니다. 마침표를 잘 찍은 거죠.” 그는 최선을 다하되, 실패해도 좌절하지 말라고 조언했다. “길이 막히면 돌아갈 수도 있어요. 잘못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사는 길은 직선이라기보다는 꼬불꼬불합니다. 길을 벗어날 수도 있고, 벗어났을 때 다시 돌아올 수도 있는 거죠. 그게 삶이에요.”

 

글 | 정윤서 기자 bono@

사진 | 염가은 사진부장 7rr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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