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원 충북대 철학과 교수
한상원 충북대 철학과 교수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에 관한 담론들이 홍수를 이루고 있다. 민주주의 정치체제가 전 지구적으로 위기에 봉착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특히나 미국의 트럼프 정권과 영국의 브렉시트 이후 본격적으로 궤도에 오른 우익 포퓰리즘과 극우주의의 급속한 성장은 이와 결부된 이민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로 이어지면서, 인종, 민족, 종교와 무관하게 평등하게 주어져야 할 시민권의 이념 그 자체 역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위기를 진단하는 목소리들이 반드시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매우 이질적인 처방들이 등장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여기에서 결정적인 물음은 이 위기의 대안으로 민주주의를 ‘확장’할 것인가, 아니면 민주주의에서 민주적 요소를 ‘축소’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필자의 시각으로는 이 중 많은 주장은 후자의 견해를 따르고 있다. 즉 명시적으로는 아닐지언정, 상당수의 논의가 포퓰리즘의 형태로 표출되고 있는 민주주의의 ‘과잉’으로 인해 민주주의가 위기에 봉착하고 있다고 보고, 대의제 질서를 강화하여 아래로부터의 포퓰리즘적 목소리를 억누르는 것, 또는 대중들이 전문가 합의에 동의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반면 필자가 이러한 논의에 대해 갖는 비판 지점은, 오늘날 전 지구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결여’가 낳은 귀결이라는 데에 있다.

방금 언급한 민주주의의 위기에 대한 주류적 진단에서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권위주의 정치세력들의 부흥, 반지성주의나 혐오 정서의 확산 등의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정치를 절차적 합의와 전문가 결정으로 환원하는 해결책이 등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에서는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들이 계속해서 축소되어왔다는 점이 바로 지금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쉽게 간과된다.

오늘날의 위기는 민주주의가 근본적인 수준에서부터 탈정치화, 탈민주화를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즉 지금의 위기는 다름 아닌 정치적 주체의 공백으로 인한 위기, 즉 주체의 위기, 주체성의 위기다. 유권자들을 소비자 정체성을 가진 집단으로 대우하는 기성정치세력들은 민주주의가 근본적으로 데모스(demos)의 권력(kratos)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서 데모스 혹은 인민(people)은 자신의 권리를 스스로 발명하며, 요청하고, 심지어 그것의 실현을 강제하는 집단적 힘을 행사하는 집단이다. 민주주의는 바로 그러한 의미에서 집합적 주체를 요청한다.

이렇듯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민주주의의 ‘과잉’이 아니라 ‘결여’에서 비롯한 것으로 진단하고, 그 처방으로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의 재활성화를 주장하는 경향을 우리는 급진민주주의로 규정할 수 있다. 급진민주주의 사유 전통에는 이 용어를 확산시킨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 외에도 많은 중요한 사상가들의 스펙트럼이 포함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필자는 자크 랑시에르와 에티엔 발리바르의 논의를 지적 원천으로 가장 많이 참조하고 있다.

이러한 학자들의 논의를 빌려 필자가 이론화하고자 하는 민주주의의 급진화 기획은 민주주의를 단지 제도와 절차, 규범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그 근본에서 ‘주체적 역량’의 관점에서 파악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입각해 있다. 그러나 급진민주주의가 대의제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주의가 대의제나 헌정주의와 일정한 방식으로 결합한다면, 급진민주주의자는 그러한 결합은 민주주의의 ‘민주적’ 요소를 제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강화하기 위해서여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 우리가 경험하는 민주주의의 위기는 정치의 소멸이라는 절멸적인 위협 앞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후 위기를 비롯한 인간과 자연의 위험 앞에서, 전쟁과 내전으로 파괴된 사회에서 도망쳐 나온 난민들의 인도적 위기 앞에서, 차별에 대항하는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의 외침 앞에서 반지성주의와 혐오정서로 무장한 정치세력들이 대중의 소외감을 이용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반면 이에 대항하는 목소리는 다른 방식으로 아래로부터의 연대와 협력을 통한 주체화 과정을 실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민주주의의 급진화 기획이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우리는 우익 포퓰리즘과 권위주의적 정치세력에 의한 주체의 호명을 넘어서, 새로운 호명과 주체화가 가능한가? 이 질문에 쉽게 답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길의 모색만이 민주주의의 새로운 전망을 열어준다는 것은 분명하다.

 

한상원 충북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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