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계를 뛰어넘는 장인의 수제품

사라지는 전통 산업에 한숨 내쉬어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할 것”

 

  한때 문전성시를 이뤘던 가게에 어느새 발길이 끊겼다. 한 가지 일에 일생을 바친 장인은 자신의 천직이 사양길로 접어드는 것에 안타까워하면서도 손을 놓지 못한다. 그들은 작업을 시작할 때면 초심으로 돌아간다. 일반적인 은퇴 시기를 한참 넘겼음에도 입을 모아 “건강이 허락할 때까진 일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했다.

 

완성된 도장을 찍어보는 조성호 명인.
완성된 도장을 찍어보는 조성호 명인.

 

  ‘하나뿐인’ 도장의 품격을 지키다

  작업할 때만 쓰는 뿔테안경을 걸치곤 수만 번의 칼자국이 새겨진 조각대 가운데에 기다란 나무토막을 박는다. 반세기를 도장만 파며 살아왔지만, 작업할 땐 긴장의 끈을 놓는 법이 없다. 새끼손톱만 한 크기의 인면(印面)에 작은 글씨를 정밀하게 새겨야 하기 때문이다. 칼질을 시작한 지 30분. 도장은 완성된 듯 보였지만, 장인의 성에 차지 않는다. 연신 고개를 기웃거리다 도장을 찍어보곤 다시 글씨를 새기기 시작한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이내 흡족한 듯 옅은 미소를 띠며 완성된 도장을 내밀었다.

  을지로3가 골목, 무심코 지나칠 법한 구형 간판이 달린 건물을 수십 년째 지키고 있는 명인이 있다. 조성호(남·78) 씨가 도장을 파기 시작한 지는 50년째다. 전자 서명이 보급되며 도장을 찾는 사람이 줄었고, 그마저도 기계로 찍어내는 ‘즉석 도장’을 선호한다. 수제 도장의 자존심을 지켜온 그였기에 직접 조각하는 도장을 고집한다. “제가 만드는 도장은 세상 누구도 똑같이 만들 수 없어요. 요즘은 기계를 사용해서 손쉽게 도장을 만들 수 있지만, 그런 도장은 자판기 버튼 누르면 나오는 인스턴트 커피와 다를 바가 없죠.” 손수 파낸 도장만 15만개. 흔들림 없는 목소리엔 장인의 자부심이 묻어나왔다.

  조 씨는 성인이 되기 전부터 동사무소에서 공문서를 작성하는 *필경사로 활동했다. 손으로 작품을 빚는 재능을 눈여겨본 선배들은 도장 사업을 시작해 보라고 권했다. 손재주를 가진 덕분에 기술을 따로 배우지 않고도 을지로에 자리 잡았다. “처음이라 서투르긴 했어도 자신감이 있던 때였어요. 신문사, 국회, 기업들의 의뢰를 받았으니 돈벌이도 괜찮았어요.”

  조 씨는 한국 근현대사를 눈으로 목격하고 손으로 기록했다. 작업실 책장에 빼곡하게 꽂힌 ‘인형본’에는 50년을 함께한 작품의 역사가 남겨져 있다. 삼성물산, 쌍방울, 동부자동차 같은 대기업의 공식 인감도 그의 손을 거쳤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엔 공인 필경사로 참여해 여러 글귀를 써냈다. “제 입으로 말하기 부끄럽지만, 나라에서 인정받은 글씨라고 할 수 있어요.”

  ‘좋은 글씨에서 좋은 도장이 나온다’는 신념으로 작업해 온 그는 여전히 글씨 연습을 빼먹지 않는다. “글씨는 해도 해도 끝이 없어요. 손님이 없는 때면 틈틈이 붓을 잡고 연습해야죠.” 조 씨의 책상엔 그렇게 잉크가 떨어진 수십 자루의 붓펜이 쌓여 있다.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을 집중하면 안 되는 일이 없다.’ 작업실에 적힌 글귀에서 조 씨가 직업을 대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손님이 중요한 일에 사용하실 도장인데 조금이라도 망치면 안 되잖아요. 그러려면 잡생각을 멈추고 신경을 한데 모아야 해요. 별게 아닌 것 같이 보여도 엄청난 집중력을 요구하거든요.”

  오랜 세월 서체와 서각(書刻) 기술을 닦아온 명인도 세월의 흐름까지 파낼 순 없었다. “7~80년대가 전성기였죠. 요즘은 찾아오시는 손님이 하루에 한두 명, 많아야 다섯 명 정도예요.” 사라져가는 도장 가게들을 보면 씁쓸했다. “주변에서 같이 도장 파던 사람들이 서서히 문을 닫고 경비직으로 이직하거나 쉬면서 노후를 보내고 있더라고요. 이젠 저처럼 손으로 도장을 파는 사람은 전국을 모두 뒤져도 10명 정도일 거예요.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속상한 마음도 들죠.” 말을 멈추고 내뱉는 조 씨의 한숨에는 평생을 함께한 도장에 대한 애정이 담겨있었다.

 

뜨거운 스파크를 일으키며 철근을 자르는 전헌 명장.
뜨거운 스파크를 일으키며 철근을 자르는 전헌 명장.

 

  잊혀가는 마지막 대장장이

  전헌(남·71) 씨는 굳은 표정으로 철근을 자른다. 불가마 옆 간신히 쪼그릴 수 있는 작은 의자에 앉아 산소 절단기를 손에 든다. 압축된 산소와 가스는 철제에 부딪히면서 뜨거운 스파크를 일으킨다. 철근이 원하는 크기로 잘리면 거푸집에 넣는다. 무섭게 타오르는 가마 속에서 철근은 제 모양을 갖춘다. 충분히 녹아 새빨간 색이 나오면 다시 밖으로 꺼낸다. 수십 년 망치밥을 먹었지만, 섭씨 800도의 가마불은 적응되지 않는다. 전씨는 연거푸 땀을 닦고 한숨을 내쉰다. ‘땅-땅-’ 한껏 달아오른 철근을 사정없이 내려친다. 쇠는 가마에서 나왔을 때 제대로 두드려 줘야 단단해진다. 첫 손님의 주문을 완수한 전 씨는 비로소 굳은 표정을 풀고 웃음을 보였다.

  서울 은평구에 위치한 한 대장간. 묵묵히 일하는 전헌 씨의 옆 이회복(남·65) 씨도 구슬땀을 흘리며 가마 앞에 선다. “지금 걸린 간판이 100년도 더 된 거예요.” 이회복 씨는 오랜 시간 전통을 이어온 대장간에 대한 자부심을 드러냈다. “장소는 옮겨 다녔지만, 대장장이들이 물려주고 물려받고를 반복하며 아직도 가게를 이어오고 있죠. 제가 4대쯤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이곳 대장장이들의 실력은 100년이라는 시간 동안 입소문을 탔다. “지방에서도 호미나 낫을 사기 위해 우리 대장간을 찾아왔어요.”

  온종일 불꽃을 튀긴지도 25년이 넘었지만, 겸손을 잃지 않는다. “장인이 되려면 한참 남았다고 생각해요. 요즘도 작업할 때마다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느낌이에요.” 망치를 잡고 모루를 두들기기 위해 스승으로부터 오랜 기간 고된 훈련을 받았다. “적어도 10년은 허드렛일을 하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워야 대장장이가 될 수 있어요. 저도 집게 잡는 데에만 5년이 걸렸죠.”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대장간이었지만, 이젠 점차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가고 있다. “하루에 다섯 명도 잘 안 와요. 경기도 좋지 않다 보니까 건설용 연장에 대한 수요가 적어서 더 힘들죠.” 줄어드는 수입뿐 아니라 어두운 미래도 안타깝다. “우리가 은퇴할 때면 대장장이는 역사 속 한편으로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제가 마지막 대장장이가 되고 싶진 않았지만 더 이상 하겠다는 사람이 없어요.” ‘장인’의 상징으로 여겨져 왔던 대장장이는 고된 노동환경과 낮은 수익성으로 외면받는 신세가 됐다. “누군가가 대장간을 이어가 주길 바라면서도 권하고 싶진 않아요. 한여름엔 말복 더위에 불구덩이에서 달궈지고, 한겨울엔 칼바람을 맞으면서도 문을 닫을 수 없거든요.” 대장간이 있을 공간마저 위태롭다. “요즘처럼 소음에 민감한 시대에는 하루 종일 시끄럽게 기계가 돌아가는 대장간을 운영할 자리가 없어요. 이 동네도 재개발하면서 이전하라고 하면 아마 100년 역사도 그렇게 끝을 낼 것 같아요.”

  아쉬운 마음을 뒤로한 채 하루하루의 일에 집중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오랜 전통의 끝물에 서 있다는 것이 아쉽긴 해도 어쩔 수 없죠. 손님의 주문을 받고 완벽하게 물건을 만드는 대장장이의 본분에 충실하기로 했어요.” 대화를 마친 이 씨는 또다시 불가마에서 녹은 철물을 꺼내 담금질을 시작한다.

 

가죽을 갈아내는 안효성 장인.
가죽을 갈아내는 안효성 장인.

 

  특별한 손님 위한 맞춤 구두

  구두 한 켤레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은 2주. 오늘은 구두 가죽에 밑창을 달아야 한다. 쉽게 신발을 구하지 못하는 손님들을 생각하며 튼튼한 구두를 위해 가죽 바닥을 갈아낸다. “밑창과 가죽이 제대로 붙지 못하면 빗물이 들어가 십 리도 못 가서 신발이 떨어져 버려요. 가죽 표면을 확실하게 벗기고 밑창을 붙여야 오래갈 수 있죠.” 신발 가죽과 밑창 사이의 굴곡 차이를 섬세하게 관찰하곤 본드를 칠하면 구두 한 켤레가 완성된다.

  서울 중구 염천교엔 수많은 구두 장인들이 거쳐 간 수제화 거리가 있다. 방 한 칸 크기의 작은 수제 구두 가게. 문을 열면 짙은 구두약 냄새 속에서 구두 명인 안효성(남·75) 씨가 반가운 얼굴로 손님을 맞는다. 두껍고 부르튼 손은 57년 구두 제작자의 경륜을 보여 준다. 휘어진 오른쪽 중지 손가락은 손수 구두를 수선하는 안 씨의 노력이 빚어낸 결과다. “손가락 사이에 송곳을 걸고 작업해야 촉감도 잘 느껴지고 속도도 빨라요. 수십 년을 그렇게 해왔더니 저도 모르는 사이에 손가락이 이렇게 됐네요.”

  안효성 씨는 선천적으로 기성품을 착용하지 못하는 고객들을 위해 한 사람만을 위한 구두를 만든다. “**무지외반증처럼 기형적인 발을 가진 분들은 시중의 구두를 착용할 수가 없어요. 저는 그분들이 편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맞춤 구두를 만들어 드리는 거죠.” 안 씨는 천차만별인 고객들의 발 모양을 세심히 고려해 최적의 구두를 선사한다.

  구두를 만들다 보면 잊히지 않는 사연의 손님들도 만나게 된다. “왼쪽 발과 오른쪽 발의 크기 차이가 심했던 손님이 계셨어요. 평생 ‘짝짝이’로 운동화만 신고 살아오셨는데 아들 결혼식엔 멋진 구두를 신고 싶다고 하셨죠.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똑같지만, 내부 구조를 다르게 만들어 그분이 신을 수 있는 구두를 만들었어요.” 모든 장인이 그렇듯 자신의 작품에 감동하는 고객이 가장 큰 보람이다. “손님께선 안동에 사시는 중학교 선생님이셨는데, 나중에 고맙다고 ‘안동 찜닭’을 한 박스 보내 주셨어요. 뿌듯하고 제가 더 감사한 마음이었죠.” 솜씨는 입소문을 탔고 구두가 필요한 이들에게 전해졌다. “발이 불편하신 분들이 편안하게 착용할 수 있는 구두를 수년간 만들다 보니 나중에는 병원에서도 저한테 구두를 맞추라고 권해 주기도 하더라고요.”

  구두에 접착제를 바르다가도 수제 구두가 점차 외면받는 현실을 얘기하며 한숨을 내쉰다. “이제 숙련공들은 60세 이하가 거의 없어요. 국내에서 직접 구두를 만드는 산업의 명맥이 이어지면 좋겠는데 참 안타까워요.” 그는 남은 인생도 뜻깊은 구두를 위해 보낼 계획이다. “최근엔 자투리 가죽을 모아서 아기용 신발을 만들고 있어요. 얼마 전엔 패럴림픽 경주 선수들이 장갑을 한국에서 구할 수 없다고 하길래 도와주고 있죠. 기회가 된다면 편한 신발을 갖기 어려운 노숙자나 오지의 선교사들을 위한 일도 하고 싶어요.”

 

  *필경사: 글씨 쓰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

  **무지외반증: 엄지발가락이 둘째발가락 쪽으로 휘어져 발의 모양이 변형되는 질환.

 

글·사진 | 윤태욱 기자 yoonve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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