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교사 병행하며 고등고시 준비

이명박 신원 보증 서준 판사

“사회 질서 형성에 힘써야”

 

김인섭(행정학과 55학번) 교우는 고려대 학생들에게 ‘촌놈 기질’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김인섭(행정학과 55학번) 교우는 고려대 학생들에게 ‘촌놈 기질’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 생각하면 꿈 같은 일인데 그 꿈이 결국 실현된 거야.” 김인섭(행정학과 55학번) 교우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회고한다. 그는 17년 판사 생활 끝에 법복을 벗은 후 ‘한국적 국제 로펌’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법무법인 태평양을 설립했다. 은퇴 후엔 법치주의 확립을 위한 시민 운동과 한국 근현대사 책 집필에 힘쓰고 있다.

 

  ‘촌놈’의 고단한 서울살이

  김인섭 교우는 1936년 8월 28일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추풍령리에서 태어났다. 초등학교 5학년 시절 그의 공부 재능을 눈여겨본 담임 선생님은 명문이던 대전중학교 입학 시험에 응시해 보라 추천했다. “당시 대전중학교는 일본인들이 주로 다니는 학교여서 입학 시험이 매우 어려웠어요. 그런데 6학년 1등 선배는 떨어지고 저만 붙었죠.” 이를 본 주변 사람들은 그를 ‘수재’라고 불렀다. “사실 운이 좋았던 거죠. 그런데 어려운 환경에서 자란 사람한테는 이게 굉장한 힘이 됩니다. 난 특별한 놈으로 태어났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된 겁니다.”

  대전중학교 생활은 그리 길지 못했다. 2학년 재학 중 6·25전쟁이 발발했다. “6월 26일 교정을 빠져나오며 친구들과 헤어진 것이 대전중학교에서의 마지막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뒤로는 가족들과 피란 생활을 했죠.” 중부 지역 수복 이후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영동고등학교에 입학했다.

  영동고등학교 2학년 시절 주임 선생님으로부터 대학교에 입학원서를 내 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6·25 전쟁 이후라 사회가 혼란스러웠습니다. 지금처럼 제도가 잘 정립돼 있지 않아서 대학에 일찍 입학하는 경우도 많았어요.” 그는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에 원서를 넣었다. “저는 서울에 가 본 적이 없으니, 어머니께서 대신 입학원서를 써 주셨습니다. 교장의 직인(職印)만 있으면 원서를 받던 다른 학교들과는 다르게 서울대는 교장의 사인(私印)까지 요구하더군요. 제 서류에는 교장의 직인만 찍혀 있었기에 남은 선택지 중 법대가 유명한 고려대를 택했죠.” 법대를 선택한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였다. “시골에서는 법조인이 뭔지도 잘 몰랐습니다. 하지만 춥고 배고프던 시절 출셋길이 고등고시밖에 없었어요.”

  고려대에 입학한 김인섭 교우가 마주한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그야말로 ‘사고무친’의 상황이었어요. 아는 사람도 돈도 없었죠. 시골에 땅이 있어 먹고 살긴 했어도 서울 유학비를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거든요.” 당시엔 장학금 제도가 없었기에 등록금을 벌기 위한 가정교사 자리 경쟁이 치열했다. 그는 수소문 끝에 버스 회사 사장 자녀들의 가정교사 자리를 구했다. “가르쳐야 하는 학생이 5명인 건 중요하지 않았어요. 촌놈이 이것저것 가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죠.”

  군 제대 후에도 생활고는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민법을 가르치던 주재황 교수의 눈에 들게 된다. “주재황 선생님께서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는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셨던 것 같아요. 한 번은 안암동에 있는 선생님 댁에 초대받았습니다.” 고등고시 공부와 일을 병행해야 하는 사정을 알게 된 주재황 교수는 가정교사 자리를 알선해 줬다. “선생님께서 저를 민복기 변호사님 딸의 영어 가정교사로 추천해 주셨습니다. 민복기 변호사님도 제 상황을 이해해 주시고 가정교사로서의 부담을 최소한으로 줄여 주셨죠.”

  김인섭 교우는 고등고시 준비에 전념했다. 고등고시를 준비하는 도중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를 비롯한 학생 운동 참여 여부를 두고 그는 갈등했다. “가정교사 일과 고시 공부를 병행해야 해서 데모하러 갈 시간이 없었습니다.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우선 고등고시에 합격한 후 다른 방식으로 국가와 사회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주재황 교수의 등록금 지원에 힘입어 그는 결국 1961년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군부 간섭에 법원 떠나 태평양 설립

  그는 판사 부임 직후 모교로부터 연락 한 통을 받았다. ‘이명박’이라는 상과대 학생이 한일회담 반대운동 주동자로 구속됐는데, 김 판사가 신원 보증을 서줬으면 한다는 요청이었다. “이명박 학생은 후배인 데다 과도 달라 일면식이 없었죠. 더군다나 군사 정권 때는 공직자가 함부로 신원 보증을 서는 것이 금기시됐어요. 처음에는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학교는 이명박을 그대로 두기엔 ‘인물이 아깝다’며 그를 거듭 설득했다. “사정을 들으니 딱하기도 하고, 어릴 적 생각도 나서 신원 보증을 서줬죠. 그 후 새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선배님 덕에 조기 석방될 수 있었다’고 감사 인사차 찾아왔던 것이 기억나네요.” 이후 이명박은 고속 승진을 거듭하며 현대건설 사장이 됐다. 김 판사는 청년들과 데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면 이명박을 예시로 들며 세상을 긍정적이고 건설적으로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김인섭 교우는 공과 사를 구분하며 직언을 피하지 않았다. 1970년대 법원행정처장직은 법관이 아닌 행정부 출신 공무원이 맡았는데, 이에 법원 내에선 행정처장이 정치적 판단에 휘둘린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김 판사는 대학 시절 인연이 닿았던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직간(直諫)했다. “법원은 관료 사회 중에서도 질서가 엄격한 곳이어서 상부를 비판하기 어려운 분위기였어요. 그래도 용기를 내서 ‘법관이 행정처장을 맡는 것이 옳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현재 법원조직법은 대법관 중 한 명이 법원행정처장을 겸임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저는 옳은 말은 해야 하는 체질이에요. 판사 그만둘 각오쯤은 여러 번 했습니다.” 김인섭 교우는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민비연) 사건’에서 학생들에게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이 기억에 남는다. 중앙정보부와 검찰은 민비연이 반국가단체라고 주장하며 재판부를 압박했다. “그땐 중앙정보부가 판사에게 외압을 넣는 게 당연했어요. 판사한테 가서 ‘문안드린다’며 은근히 위압감을 주는 거죠.” 그가 속해 있던 재판부는 학생들의 자백이 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인한 거짓 진술이라고 판단하고 민비연의 반국가단체 구성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김인섭 교우는 군부가 사법부의 독립을 훼손하는 행태를 보며 판사 업무에 대한 보람을 잃었다. 박봉으로 인한 생활고 역시 그를 힘들게 했다. 그는 결단을 내렸다. “점점 판사 일이 답답해졌고 나라 살림은 혼란스러웠죠. 주변 모두가 말렸지만, 결국 법관 생활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법원을 떠난 김인섭 교우는 이원화된 법조계에 문제의식을 느꼈다. “당시 판·검사 출신 국내 변호사가 미국에서 유학한 국제 변호사를 배척하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사회는 국제화되는데 법조계가 그 흐름을 거스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죠.” 그는 법조계 일원화를 위해 법무법인 태평양을 설립했다. ‘한국적 국제 로펌’을 추구하는 태평양은 토종 로펌의 주 업무였던 송무 분야에서 출발해 점차 기업·국제 법무 분야로 영역을 넓혀갔다.

  그는 태평양의 성장 비결로 ‘인재 영입’을 꼽았다. 태평양은 사적 관계 배격을 채용 원칙으로 삼았다. “철저하게 실력과 가치관만을 기준으로 사람을 평가하다 보니 주위 사람들이 ‘야박하다’고 말했죠. 하지만 지금도 그렇게 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또한 민주화를 기본 철학으로 삼고 수평적 조직 문화를 도입했다. 태평양에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였다. “좋은 인재들이 태평양에 오고 싶어 하기 시작한 거죠. 법조계가 좁은 만큼 소문이 금방 퍼지더라고요.” 1980년 김인섭 변호사 홀로 시작한 태평양은 현재 소속 변호사가 522명에 달하는 국내 대표 로펌으로 자리 잡았다.

  김인섭 교우는 65세 때 태평양 대표변호사 자리에서 물러났다. “로펌을 운영할 때는 ‘로펌 경영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로펌의 ‘롤 모델’이 되려 했던 거죠. 목표를  이뤘다고 생각했기에 미련 없이 은퇴했습니다.”

 

  은퇴 후 법치주의 확립 운동

  김인섭 교우는 자신을 ‘빚꾸러기’라 부른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기에 제가 이렇게 클 수 있었어요. 만약 공산주의 사회나 제국주의 시대에 살았다면 지금의 저는 없을 겁니다. 제가 사회에 기여한 것보다 사회가 제게 해 준 것이 많으니 빚을 진 거죠.” 법치주의 운동 역시 그가 은퇴 후 사회에 진 빚을 갚기 위해 시작한 과업 중 하나다. “은퇴할 무렵 개혁의 물결과 압축성장의 후유증으로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웠어요. 법치주의가 바로 서지 못했기에 발생하는 문제라고 생각했죠. <법치주의와 한국의 장래>라는 책을 써서 한국에 법치주의를 정착시키려고 노력했어요.” 2004년에는 그의 취지에 공감하는 은퇴 원로 22명이 모여 ‘포럼 19-21’을 만들었다. 이 시민단체는 현재 ‘굿소사이어티’라는 이름으로 확대·개편돼 운영 중이다.

  그는 고려대 학생들이 ‘촌놈 기질’을 지켜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너무 옛날이야기일 수 있지만, ‘고려대학교’ 하면 순박하고 촌놈들이라는 인상이 있어요. 뒤에서 불평불만을 토로하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서 문제해결을 위해 노력하는 ‘촌놈’처럼 살아가길 바랍니다.” 법치주의에 대한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남의 권리를 침해해서 돈과 권력을 쥐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집니다. 사회공동체의 한 사람으로서 법질서를 잘 지키는 지성인이 되시면 좋겠습니다.”

 

글 | 노진기 기자 nobita@

사진 | 한희안 기자 onefrea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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