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적인 고구려 토기의 하나로 긴 목과 나팔처럼 벌어지는 아가리가 특징이다. 발달된 어깨에는 네 개의 띠고리손잡이가 달려있고, 그 아래 좌측에는 나쁜 기운을 막아달라는 의미에서 우물 정(井)자 부호를 새겨 넣었다. 높이는 59cm이며, 아가리의 지름은 39cm이다. 이런 형태의 항아리는 주로 고분에서 출토되며 부장용이나, 의례용 등 특수용도로만 사용됐다. 나팔입항아리는 4세기 이후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몸통과 목이 점차 좁고 가는 형태로 변화 발전되면서 발해시기까지 계속 사용된다.

이 유물은 1988년 서울의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것으로 형태적인 특징으로 보아 5세기 중후반 경에 속하며, 이는 475년 장수왕이 백제의 한성(漢城)을 함락하고 남겨놓은 물증으로 해석된다. 남한에서 발굴된 최초의 고구려 토기로서 이를 계기로 아차산에서 많은 수의 고구려 보루를 조사할 수 있게 됐으며, 이를 통해 남한에서 고구려 고고학연구가 본격화됐다.

고구려에는 기와 만드는 일을 관장하는 ‘조와소(造瓦所)’라는 관청이 있었으며, 토기를 비롯해 흙을 빚어서 기물을 만드는 일은 국가적으로 중요한 일이었다. 고구려 토기는 백제나 신라·가야토기와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우선 모래가 거의 섞이지 않은 고운 점토질(泥質)의 바탕흙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모든 토기의 바닥은 납작한 것이 특징이며, 같은 시기 백제나 신라?가야의 항아리는 모두 둥근 바닥인 점과는 대조적이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평상 위에서 생활하였고, 입식생활을 하였던 점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토기는 문양으로 장식된 것이 드물다. 간혹 무늬가 장식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고분에서 출토된 부장용이거나 의례용기이다. 대부분의 생활용기는 무늬가 없는 간소한 형태이며 실용적이지만 전체적인 모양과 손잡이 등을 이용해 조화된 형태를 만들어 냈다. 고구려 토기는 제작기법이나 형태상 오늘날 민가에서 사용하는 옹기와 매우 유사한데, 고구려 토기의 이러한 특징이 통일신라와 고려 및 조선의 도기를 거쳐 오늘날의 옹기에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최종택 인문대 교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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