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이맘때쯤 꼭 한번씩 심하게 앓고 지나가는 홍역 같은 것이 있다. 이것을 앓을 때가 왔다는 것은 갑자기 닥치는 한파에서 직감할 수 있으며, 그 급격한 날씨 변화의 이유는 한 맺힌 영혼들이 한꺼번에 지상에 내려오기 때문이라는 결코 웃지 못 할 얘기가 전해진다. 올해도 홍역은 어김없이 찾아왔고 앓고 난 흉터는 도무지 아물 생각을 하지 않고 있다.

‘어머니 수능시험 잘못 봐서 죄송해요’ 라고 문자를 남긴 채 한강에 투신한 소년. 연루된 사람이 몇 명인지 정확히 셀 수 없을 정도로 일파만파로 퍼져가는 휴대폰을 이용한 대리시험.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죄송하게’ 했고, ‘하지 말라’는 금지된 행위를 하게 만들었을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절정부분에서 “나는 유명한 배우였다. 난 참 잘했다.” 라는 독백과 함께 한 소년이 자살한다. 자신이 주연한 연극에서처럼 왕관을 머리에 쓴 채. 연극을 좋아하고 그것을 하길 원했던 그의 말을 아버지는 귀담아 듣지 않았다. 단지 의대로 진학하길 명령했을 뿐이다.

이것은 단순한 영화가 아니다. 지금, 이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다.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학생들은 어디론가 ‘내몰리고’ 있다. 설사 알게 된다 하더라도 가고자 하는 방향이 내몰리는 쪽과 다르다면 배척당하고, 바꾸길 종용받는다.

이제는 더 이상 줄세우기를 강요하는 교육이 아닌 스스로가 자기 삶을 연출하고 주연할 수 있도록, 꿈을 꺾는 것이 아니라 격려의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교육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전형방법의 다양화와 기존 교육구조에 대한 개혁에의 요구는 필수불가결하다.  여기에 고등교육과 연구의 연계 및 전공의 세분화, 다양한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한 프랑스 교육은 선례를 남기고 있다.

2004년 한국판 ‘죽은 청소년의 사회’. 이를 끝으로 더 이상의 비극을 목도하지 않게 되길 바라는 마음이 매우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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