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9월 8일, 2차 대전 전승국으로 국내에 첫 발을 디딘 미군은 전국 18개 도시에 주둔지를 형성했다. 미군이 주둔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기지촌이 들어섰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30만이 넘는 여성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미국 정부는 자국 병사들에게 안전한 휴식과 섹스 제공이, 한국 정부는 주한 미군에게서 나오는 달러와 안보의 약속이 필요했다. 양국의 이해에 따라 유지되어 온 기지촌은 올해로 50년을 맞는다.

1953년 10월 1일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동두천 △의정부 △오산 △평택 등에 미군 기지가 형성됐다. 기지 주변에는 식량과 일자리를 찾아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전쟁고아나 미망인, 그리고 전 일본 위안부 여성까지 생계를 위해 기지촌에서 윤락을 시작했다. 1962년, 박정희 정부는 사회분위기 단속을 위해 윤락행위 방지법을 규정했다. 이 때 매매춘 허용지역 104개가 발표되는데 이 중 60%는 기지촌이었다. 이는 미군을 위시한 정부의 암묵적 배려였다. 이때부터 기지촌 여성들은 정부의 정책아래 외화벌이 수단으로 이용됐다. 기지촌 여성들에게 달러벌이의 전사임을 강조하고 아메리카타운 주식회사를 설립하는 등 정부의 강력한 육성정책으로 1964년 당시 기지촌은 연간 100만 달러의 수익을 내기도 했다.

이런 운영 속에서 1960년대 후반에는 △의정부·송탄지역 여성처우 반대시위 △미군 인종차별문제를 둘러싼 기지촌 내 갈등 △열악한 환경에 따른 성병 발병 등의 기지촌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했다. 미군이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해달라고 강력히 요구하면서 1971년 12월 청와대 직속 ‘기지촌정화사업’이 추진된다. △영어 및 교양교육 △성병 검사 및 보건소설치 등을 통해 여성들을 통제?관리했다.

계획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아래 기지촌 여성들은 이전보다 더 심한 억압을 받았다. 그리고 그들은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졌다.
20년이 지나 기지촌여성 윤금이 살해사건을 통해 억압받는 그들의 목소리에 사람들이 주목하기 시작했다. 1992년 발생한 이 사건 외에도 공식적으로 알려진 10여건의 기지촌여성 살해사건이 세상에 알려졌다. 기지촌여성의 비극이 드러나고 있지만 이들의 인권은 아직도 어둠속에 묻혀있다.

김현선 새움터(성매매 피해여성 지원센터)대표는“많은 기지촌여성 살해사건을 보면 미군 수사당국이나 한국 경찰 모두 사건을 편파적으로 수사하고 범인을 밝히기 보다는 은폐하려는 것 같이 보였다”며 문제를 지적했다. 최근에는 러시아, 필리핀등지의 여성이 한국 여성을 대신해 불법체류, 포주의 착취와 멸시, 가난, 범죄노출 속에서 기지촌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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