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교 100주년을 맞이해 한국인 최초의 법학 정교수이자 본교의 첫 한국인 정교수였던 최태영 박사를 만났다. 1900년생인 최 박사는 현재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간병인의 도움을 받고 있었지만 병실안에 가지런히 놓인 책들과 박사의 온화한 말씀은 올곧은 학자의 일생(一生)을 웅변하고 있었다.

깨끗하게 옷을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기자를 맞은 최박사는 보성전문학교의 정교수가 된 과정을 이렇게 설명했다. 최 박사는 경신학교를 졸업한 뒤 영미법을 배워오라는 부친의 말씀에 따라 1918년 메이지(明治)대 법학부 예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법학과 영어·철학 등을 공부하고, 1924년 귀국할 당시에는 교수로 임명받을 자격을 가진 조선인 유학생은 그 밖에 없었다. 귀국 한 뒤 일제하 경성법전의 교수직을 마다하고 바로 보성전문 법과의 정교수가 됐다. 최박사가 정교수가 될 때까지 보성전문의 교수들은 모두 일본인 이었다. 최 박사는 보전에서 한국 최초로  ‘뉴욕 유가증권법’을 강의하는 등 상법·민법·행정법 등을 가르쳤다.

최박사는 보성전문의 교수시절 경신학교의 교장을 겸하면서 혹독한 일제하에서도 배일(排日)의 자세를 견지했다. 최박사는 몇 가지 에피소드를 들며 일제치하를 회고했다. 일제하 모든 학교들은 사사건건 일본인의 간섭을 받아야 했지만, 최박사는 신사참배를 단 한번도 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피치못해 가야 할 때는 일본인을 대신 내세웠다.

또한 당시 전임강사 이상은 학도병연설을 해야 된다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학도병 연설을 피하기위해 아무도 몰래 정교수직에서 강사직으로 내려앉았다. 그래서, 학도병 연설 요구에 비켜설 수 있었다. 하지만 학도병에 끌려가는 제자들이 생기면 직접 찾아가 실탄사격 방법과 청나라 말(淸語)을 몰래 가르쳐주었다. 최전선 접전지대에 배치될 때 기회를 엿보라는  무언의 가르침이었다. 그래서, 많은 제자들이 만주 중국군 부대로 탈출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바로 그 학생들이 몇 해 전까지는 최박사를 찾아왔다고 한다.

1945년에 총독부에서 ‘일어 상용 촉진회의’ 가 있었을 때 다른 조선인 교장들이 일본어 상용에 찬성했을 때 최 박사는 총독부 고관들이 있는 공개석상에서 일본어 상용을 공식반대했다. 이로 인해 죽음의 위협을 맞았지만, 그 며칠 후 히로시마에 원자탄이 떨어져 조선은 광복을 맞이했다. 최 박사는 이 때를 회상하며, “원자탄이 나를 살렸다. 사실 나는 피하기 선수다”라며 몇 개 남지 않은 이를 보이며 소년처럼 웃으신다.

최박사는 보성전문 시절을 돌아보며, 일제 강점기간 중에도 인촌 김성수 선생과의 밀약으로 최초의 대학학술지인 보전논집(普傳論集)을 한글로 발표한 일을 중요한 성과로 꼽았다.
해방이후 최 박사는 부산대 인문대학장, 서울대 법대학장, 청주대 대학원장을 역임했다.
최박사는 정년퇴직 후 한국 상고사 연구에 몰두해 단군조선의 실체를 밝히고, <삼국유사>에서 환국(桓國)이 환인(桓因)으로 변조된 것을 증명하며 <한국상고사>(1990),<인간 단군을 찾아서>(2000),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2002)를 발간했다. 이 같은 성과는 건국이후 고시에 국사과목을 필수과목으로 집어넣기를 주장하면서, 당시 한국 역사가 일본의 식민사관 그대로임을 발견할 때부터 시작된다. 최 박사는 정인보의 ‘조선사연구’부터 다시 읽으며 역사연구에 들어간 것이다. 

쉽지 않은 말씀 끝에 본교생에게 한마디 말씀을 부탁드린다는 기자의 청(請)에 “ 고려대학교 100주년을 축하합니다. 학생들은 한국역사의 위기가 많은 이 때에 남에게 속지 말고 바른 역사의식을 갖길 바란다”며 고대와 자신의 깊은 인연을 강조하신다.

몸이 불편한 가운데 아직도 밤에 수 시간씩 책을 읽고, 지난 4월 1일자 학술원통신에 글을 기고하며 한국의 근현대사를 관통한 학자의 꼿꼿한 자세를 지키고 있는 최태영 박사. 최근에 찾는 이들이 드물다는 병원 관계자의 말에 괜시리 부끄런 생각이 기자의 마음에 일었다. 오는 6일(금)은 음력 3월 28일로 최박사의 연치(年齒)가 106세가 되는 날이다.

최 박사는 자신의 인생을 이렇게 자평한다. “구원산 밑의 조그만 애가 시방 백살이 넘었다. 영감이 악의가 하나도 없는 사람인데 벼슬은 절대로 않고 살면서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해서 법학과 단군에 관한 책도 몇 권 남겼다.”

개교 100주년이 되는 이 때, 고대의 방명(芳名)을 누군가에게 고마워한다면 최 박사의 학자정신을 결코 놓쳐서는 안될 것이다. 인사를 깊이하고 병실 문을 나설 때 고대인의 한 사람으로서 옷깃이 저절로 여며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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