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암골 호랑이’는 본교생을 상징하는 대명사다. 안암동은 본교 재학생이나 교우들에게 보금자리로 인식되고 있다. 교가의 첫부분에 등장하는 ‘안암의 언덕’은 본교를 떠올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또 본교의 100년 역사 중 안암동에서의 70년은 빠른 시대변화에 따라 본교가 급격하고 큰 발전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안암동의 대부분은 본교 캠퍼스와 주변 상권이 차지하고 있다. 본교의 행정이나 시설의 변화에 따라 안암동이 변화하기도 했고, 안암동의 변화가 본교에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이처럼 본교와 안암동은 밀접한 관계를 맺고 함께 발전해왔다.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소재인 안암동은 서울의 오래된 동 명칭중 하나이다. 안암이라는 명칭은 지금의 안암동 3가에 앉아서 편히 쉴만한 큰 바위인 ‘앉일바위’가 있었는데 그것을 안암(安岩)이라고 옮겨 쓴 것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안암동은 ‘경기도 경성부 숭신면 안암리’에서 ‘고양군 숭인면 안암리’가 됐다가 ‘안암정’으로 바뀌었다. 안암동의 서쪽은 안암천을 끼고 안감내길이 동서로 관통하고 있으며, 동 면적의 대부분을 안암캠퍼스가 차지하고 있다.

본교와 안암동의 인연은 1934년 서울 종로구 수송동에 있던 본교의 전신 보성전문학교가 안암동으로 옳겨오면서 시작됐다. 보성전문학교는 처음에 수송동의 러시아어학원 건물을 빌려 쓰다가 1922년 9월에 송현동의 구 천도교 본부로 이사하게 됐다. 1928년 9월 4일의 이사회에서는 넓은 대지에 새 교사를 건축해 학교를 발전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고양군 숭인면 신설리의 대지와 산림 1만 437평을 매수할 것을 결정했다. 1932년 새로 구성된 재단법인의 이사이며 교장이었던 인촌 김성수는 전 이사회에서 예정했던 신설리의 대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더 넓고 좋은 부지를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던 중 안암동의 총 6만 2000여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안암동 새 교사 건축 공사는 1933년 8월 1일 시작해 1934년 9월에 완공됐다. 1933년 9월 28일 오전 10시 30분에 교수·직원·학생은 송현동 구교사에서 고별식를 하고 전 학생이 본교의 교기, 구간판과 우승기·컵을 들고 행렬을 지어 안국동에서 안암동의 새 교사까지 행진을 했다. 이때부터 본교의 ‘안암동 시대’가 시작됐다.

안암동은 본교가 자리하고 있는 곳이었지만 정문 앞 상권이 발달해 있었기 때문에 상권은 크게 발전하지 못했다. 정경대 후문 24시간 개방은 안암동 발전의 계기가 됐다. 정경대 후문 근처에서 20년동안 하숙집을 운영해 온 김춘예 씨는 “정경대 후문이 개방되기 전에는 하숙집이나 가게가 거의 없었다”며 “당시에는 안암로타리 부근이 이 지역의 번화가였다”고 말했다.
정경대 후문 근처에는 음식점과 생활편의시설이 들어서면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또 소규모로 하숙을 치던 예전과는 달리 많은 학생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주택을 신축하거나 개조한 기업형 하숙집이 생겼고, 원룸은 최근까지도 계속 들어서고 있다. 정경대 후문 개방에 이어 2000년 지하철 6호선 안암역이 생기면서 안암동 상권은 더욱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안암역이 생기자 본교 주변의 대표적인 상권으로 꼽히는 참살이길에 상가가 많이 들어서면서 번화하게 됐다.

이에 비해 안암동 새 교사로 이사온 이후 본교 주변의 주요 상권이었던 정문 앞 제기동 상권은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 안암동의 동쪽에 위치한 동대문구 제기동에는 경동시장과 제기시장이 있어 예전부터 상권이 발달한 곳이었다. 지금도 남아있는 ‘고모집’, ‘충주집’ 등의 막걸리집은 본교생들이 즐겨 찾는 유일무이한 학교 주변 번화가였다. 그러나 정문 앞 상권은, 길 건너에 위치해 지하도를 통해 건너가야 하는 불편함 때문에 통행이 편한 정경대 후문 상권에 밀리게 됐다.

법대 후문 근처 지역인 종암동은 본교 뒷산에 종처럼 생긴 큰 바위를 종암이라고 한 데서 동 이름이 유래됐다. 본교 근처의 종암 1동은 주택가와 고시원·원룸 등이 밀집해 있고 음식점이나 상가는 크게 발달하지 않았다. 종암 1동과 종암 2동에는 최근 아파트가 많이 들어서 있다.

이렇게 생활여건이 나아지고 상권이 발달한 안암동의 인구 변화 추이는 어떨까. 20여년 전에 비해 안암동의 인구는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1979년 2만 3032명이었던 인구는 1996년 2만 227명으로 줄었고, 지난해에는 1만 7017명이 안암동에 살고 있는 것으로 집계됐다. 또 안암동은 전입 인구 4156명, 전출인구 4557로 집계돼 인구가 감소추세에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비해 종암동은 지난해 전입 인구 9331명에 비해 전출 인구 7478명으로 집계돼 인구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본교는 안암동을 터전으로 70년을 발전해왔고 안암동의 변화에도 큰 영향을 줬다. 세계로 나아가는 앞으로의 100년의 터전이기도 한 안암동과 본교 주변 다른 지역의 발전도 더불어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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