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00년 전인 1805년 5월 9일 프리드리히 쉴러는 짧고 고뇌에 찬, 그러나 영화롭기도 한 생을 마쳤다. 그는 최초의 독일 전업 작가 중의 한 사람이었고, 자유를 위하여 투쟁한 사람이었으며, 개혁을 위하여 투쟁한 작가였다.  “그는 애국적 열광자에게는 영웅화의 전형”이었으며, 그의 전 작품은 모든 사람의 인구에 회자되는 국민적 고전작가로, 교양교육의 전거로, 혹은 격언으로  인용되었다. 또한 그의 작품은 19세기 중반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시민들의 암시적인 영웅을 지지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우리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살아온 바를 관찰한다면 그만큼 용감한 사람은 드물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인간의 해방은 자유를 가져왔으나,  ‘만인 대 만인의 싸움’으로 혼란에 이르자 지식인은 정의롭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사회 안정을 위하여 특정인에게 특권, 즉 왕권신수설을 부여하는 논리를 펴 그들을 막강한 제왕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절대주의를 가져왔으며, 혼란한 시대에서, 지식인이 예상하였던 것처럼, 사회는 안정과 번영의 시대로 발전하였다.  그러나 그 대가로 모든 자유는 유보되었으며 왕을 비판하는 모든 언로는 봉쇄되었다. 제후들을 비판하면 재판 없이 처형당하거나 아무도 모르게 몇 년이고 지하 감방에서 고초를 겪으며 죽어가야 했다.

절대주의 통치 하에서, 지식인은 속으로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를 알고 있고, 정의가 무엇인지 알고 있다고 하여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서는 안 되었다. 정의는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결코 드러내서는 안 되는 사회가 계속되었다. 제후들이 도덕과 정치를 분리하였듯이 지식인도 내면과 외면을 분리하고 살아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군주에 복종하는 사람만이 살아남는다. 복종하지 않는 자는 처형된다. 그러나 죄는 처형당한 자에게 있다. 신하는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의 양심을 숨겨야만 한다.”

25세의 청년 쉴러는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기 5년 전 아주 중요한 연설을 한다. 제목을 ‘도덕적 기관으로서의 무대’라고 붙인 이 연설문은 아무도 말할 수 없었던 이 시대의 주목할 만한 다큐먼트에 속한다. “세상법의 재판권 영역이 끝나는 곳에서 무대에서의 재판은 시작합니다. 정의가  황금에 눈멀고 악덕이 뇌물을 탐할 때, 또한 권력자의 불법이 정의의 무능함을 비웃고, 인간에 대한 공포가 당국의 팔을 묶어 놓을 때, 검과 저울을 손에 들고 무서운 법정이 되어 그러한 악덕을 단죄합니다.” 이 연설문에는 아주 현명한, 그러나 비판할 수 없는 제후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간교하게 숨어있다.

18세기의 서양 지식인은 강력한 힘을 소유한 군주들에게, 군주들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 간접적인 방법으로 대항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엄격한 유신시대에 학생들이 봉산탈을 쓰고 유신을 비판하였듯이, 대학 강의실이라는 제한된 구역에서 교수들이 ‘학문’이라는 이름으로 독재를 비판하기 시작하였듯이, 이 제한된 구역중의 한 곳이, 더욱이 가장 강력한 효과를 얻을 수 있었던 곳, 세상법인 군주들의 법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 ‘연극무대’였다. 쉴러는 이것을 간과하지 않았다. 그는 이곳이야말로 그의 성소이고, 정의가 힘을 얻고, 불의를 벌하는 곳이며, 모랄과 정치가 일치하지 않는 군주들을 재판하는 곳으로 삼았다. 지식인은 이곳에서 겉과 안이 분리되어 있는 곳이 아니라, 정의를 말하고, 악을 벌하는 곳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정의를 위하여 난파하는 주인공을 등장시켜 모든 일반 대중이 안에서만 침묵하며 밖으로 향하고 싶은 짐승을 닮은, ‘임금님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폭로의 소망을 연극이라는 ‘사실적인 모방 사회’를 통하여 폭로하였다. 이것은 도래할 세계, 갖고 싶은 소망의 세계를 머릿속에 그리도록 하였을 뿐만 아니라, 암암리에 그것에 대한 실천을 공개적으로 - 그러나 현행법상으로는 처벌 불가능한 - 무대 위에서 선각자들이 외치도록 하였다. 그의 무대 위의 재판석을 정치비판을 하는 곳이며, 무대 위에서 엄격한 도덕률을 기준으로 벌어지는 정치영역은 현실의 정치영역을 심판하는 자리로 만든 것이다. 비록 극장 밖의 현실세계가 권력자에 악에 의해서 정의가 웃음거리가 될지라도 무대 위에서 정의가 실현되는 것을 이상으로 삼도록 비판하며 부덕한 제후들을 심판하려 하였다.

이미 어렸을 때부터 군주로부터 ‘금지’와 ‘구류’ 판정을 받고, 결국에는 고향을 버리고 탈주병으로서 혹독한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외국을 전전하던 그에게, 군주는 시대적 타도의 요청이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적으로도 적대 인물이었다. 그가 행한 연설의 내용은 결코 무대 위에서만 미적으로 좋은 효과를 내려고 한 것만이 아니다. 그는 세상법을 개선 혹은 개혁하기 위하여 무대에서의 ‘효과’를 이용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는 이점을 숨기지 않았다. 같은 연설문에서 “정의가 벌주지 못하고 그대로 버려둔 많은 악덕을 무대가 벌하는 것입니다. 정의가 침묵하고 있는 무수한 덕을 무대가 칭송하는 것입니다”. "훌륭한 연극무대가 국민정신에 끼치는 큰 영향을 간과할 수 없으므로” 그는 숨기지 않고 연극무대로부터, 어떤 효과를 현실 무대로 옮기겠다는 의중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연극무대야말로 지혜의 빛이 사색적이고 보다 나은 일부 국민(작가 혹은 예술가)에게서 흘러나와 거기서 부드러운 광선이 되어 국가 전체로 퍼져 나가는 공통의 운하입니다. 올바른 개념, 순화된 원리, 순수한 감정이 무대에서 흘러나와 국민의 모든 혈관을 통과하면, 야만의 안개와 미신의 안개가 사라지고 밤은 승리하는 빛에게 자리를 양보할 것입니다.”

쉴러는 ‘야만’이란 단어를 정치적인 것과 연결하여 사용하는 때가 많으며 특히 인간의 미적 교육에 관한 서한 중 유명한 아홉 번째 서한에서 당시의 국가를 통치하고 있는 법을 ‘야만적 국법(혹은 국가체계)’이라고 부르면서 “모든 정치적인 것의 개선은 (인간의) 성격을 고매하게 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야만적 국법의 영향 하에서 성격을 고매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그 도구로서 국가가 범할 수 없고 “입법자도 범할 수 없다”고 믿고 있는 “예술”이라고 한다.  그의 연극무대는 예술로 정치 현실을 타개하는 현실 비판의 무대가 된 것이다.

쉴러의 숨겨진 의도는 도덕적 무대를 통하여 현실세계에서는 이분화한, 분열된 ‘도덕과 정캄를 무대 위에서 정치는 도덕과 일치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또 비판하는 것이었으며, 바로 현실을 심판하는 “정치 비판”으로써, 높은 보좌에서 임금을 끌어내리려는 역할을 한 계몽주의 시대에 유럽 지성사에서 몇 안 되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다. 그러기에 그를 유럽 지성사에 “정치적 메시아”라고 부르고 있다.

자유수호자로서의 프리드리히 쉴러를 서거 200주년을 맞아 다시 기억하는 것은 아직도 지구 곳곳에, 우리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독재자를 퇴치하는 하나의 반성적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승옥 문과대 교수·독어독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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