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와 쉴러의 동상.
“내 인생에서 가장 유익한 사건이었다” 쉴러가 요한 볼프강 폰 괴테(Goethe, Johann Wolfgang von)와의 만남을 표현한 말이다. 쉴러와 괴테는 서신교환을 시작한 1794년부터 쉴러가 사망한 1805년까지 상대의 작품을 격려와 비판을 하면서, 공동작업도 하는 등 서로의 문학활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대표적인 예가 괴테의 <에그몬트>와 쉴러의 <빌헬름 텔>이다.

괴테는 모티프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어 작품의 극적 효과를 떨어뜨리는 경우가 있었다. 쉴러는 <에그몬트>의 감옥 장면에서 판결문이 낭독될 때 가면을 쓰고 외투를 입은 알바를 배경에 등장시킴으로써 에그몬트의 감정을 극대로 표현하도록 했다. 이는 무대효과에 약한 괴테의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서였다.

쉴러는 대담하게 작업하는 스타일이었다. <빌헬름 텔>을 구성할 때 쉴러는 맥락에 관계없이 게슬러에게 사과 한개를 나무에서 따게 한 뒤 그것을 어린아이의 머리 위에 올려놓고 활로 쏘아 맞히도록 하고 싶어했다. 이에 괴테는 그런 잔인한 장면에는 적어도 그것에 합당한 동기를 부여해야 한다며 텔의 아들로 하여금 아버지의 능숙한 솜씨를 총독에게 자랑하는 장면을 넣도록 권유했다. 

이처럼 쉴러와 괴테는 서로 작품의 결점을 보완해주기도하고 공동문학활동을 하기도 했는데 △문학잡지 <호렌> △공동작시 <크세네엔> △공동 논문 <서사문학과 극문학에 대하여>가 그것이다. 

<호렌>은 인류의 순화라는 이상에 초점을 두고 발간한 잡지다. 1794년 호렌의 발간을 통해 쉴러와 괴테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것, 시대를 초월하는 고상한 것을 담아내려고 시도했다. 쉴러는 <고전주의 프로그램>에서 <호렌>을 시대의 모든 영향을 극복하고 보편적이며 보다 높은 관심을 통하여 시대를 다시 자유롭게하고 정치적으로 분열된 세계를 진리와 미의 깃발 하에 다시 합일하는 잡지로 만들겠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정치적으로 분열된 세계란 당시 독일의 지방분권적 정치를 뜻했다.

그 뒤 1796년 실러와 괴테는 문예연감에 공동 작시 <크세니엔>을 발표한다. <크세니엔>은 자신들의 이념에 맞지 않는 작가와 학자들, 비평가들에 대한 풍자시이다. 실러가 “진정하고 시적인 악마의 짓거리”라고 부를 정도로 당시 문학인들을 실명까지 거론하며 비판했다.  괴테는 <크세니엔> 대해 “나의 글은 소박하고 평범한 반면 쉴러의 글은 신랄하고 격렬하다”고 평했다.

1797년에는 서사문학과 극문학의 형식문제 및 구조문제에 관하여 편지를 주고받았고 이 해 괴테는 <서사문학과 극문학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쉴러에게 보내 수정을 부탁했다. 결국 이 논문은 공동이름으로 발표됐다. 이 논문은 서사문학과 극문학의 차이점에 대해 다뤘으며 각각을 음유시인과 광대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쉴러가 1805년 세상을 떠나면서 둘의 우정은 끝을 맺었다. 그러나 괴테는 쉴러를 잊을 수 없었고 쉴러가 죽은 뒤 그는 에커만에게 이렇게 말했다. “쉴러 본연의 창작력은 이상적인 측면에 있으며 이점에 있어서 그와 견줄 수 있는 작가는 독일문학과 외국문학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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