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은 1980년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하면서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을 내세워 소수민족 정책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특히 1989년 동구권이 변화하고, 1991년 소비에트가 해체되면서 국경 지방의 소수민족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으며, 1992년 한국과 중국이 수교한 이후에는 동북지방에 대한 관심이 더욱 각별해졌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탈북자들이 대거 중국으로 넘어오는 사태가 빚어지자 중국은 동북지방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을 하면서 대책을 세우게 됐다. 이즈음 동북지방의 연구기관들이 동북지방의 역사와 지리 및 민족문제와 관련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고구려를 중국의 소수민족 지방정권으로 보고,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연구결과들이 발표됐다.

‘동북공정’에서 한국고대사에 대한 연구는 고조선과 고구려 및 발해에 걸쳐있지만 가장 핵심적으로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고구려로서 특정주제로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을 한국이 특히 주목하고 있는데, 이는 고구려를 고대중국의 일개 지방민족정권으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동안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의견들이 있었으나 중국이 국가적 프로젝트인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를 중국의 지방정권으로 단정해 공식적 견해로 확정해 버렸다. 중국 측에서는 그 이유에 대해서 몇 가지 제시를 하고 있으나 사실에 비춰볼 때, 수긍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이다.

고구려가 중국영역내의 민족이 건립한 지방정권이라는 것, 활동중심에 있어 몇 번의 천도가 있었으나 결코 한사군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 고구려가 줄곧 중국역대 중앙왕조와 군신관계를 유지했고, ‘중국’ 밖으로 벗어나기 위해 그 관계를 스스로 끊지 않았다는 것, 고구려 멸망 후에 그 주체집단이 한족에 융합되었다는 것 등을 내세워 고구려가 고대중국의 지방민족정권이었다는 것이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 것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고구려와 고려 및 조선족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고구려의 고씨와 고려의 왕씨는 혈연적으로 다르며 시간적으로 250년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역사적 계승성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족원은 중국사서에서도 예맥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부여와 백제와 같은 종족이다. 조공과 책봉을 가지고 종주국과 복속국과의 관계라 주장하지만 이는 동아시아의 고전적인 국제질서상의 외교적 형식에 불과하다.

한편 고구려와 수·당과의 전쟁을 중앙정권과 지방정권과의 내전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수나라는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패하여 멸망했으며, 이는 분명히 동아시아의 국제전이다. 고구려의 유민이 당나라로 끌려갔기도 하고, 신라나 돌궐로도 갔으나 대부분은 그 고구려 지역에 남아 발해를 건국하는 주체세력과 주민구성에 참여했기 때문에 발해로 이어졌다고 할 수 있다.

고구려와 고려는 계승성이 없다고 강변하지만 고려는 고구려를 부흥한다는 계승의식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한 것이며, 고구려의 도읍 서경을 중요시했던 것이다. 만약 성씨가 같지 않아 계승성이 없다고 한다면 중국의 왕조는 한족과 북방민족이 번갈아가며 중원을 차지하였으므로 계승성이 전혀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과연 고구려를 한국사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지 살펴보겠다.  삼국지로 잘 알려진 위·촉·오(魏·蜀·吳) 삼국의 역사를 기록한 <삼국지(三國志)> 위서 동이전(魏書 東夷傳)에는 오환과 선비 및 동이에 대한 기록이 입전돼 있다. 그리고 소위 동이전에는 부여, 고구려, 동옥저, 예, 마한, 진변, 왜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따라서 찬자인 진수는 <삼국지>에서 오환과 선비 및 동이를 삼국사(위·촉·오)가 아닌 다른 민족의 역사로 인식하고 서술했다.

이 기록을 가지고 만약 고구려가 중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한다면 오환과 선비 및 동이뿐만 아니라 남만(南蠻)과 북적(北狄) 및 서융(西戎)가 모두 중국사의 일부가 된다. 더구나 동이전에 입전돼 있는 고구려와 아울러 부여, 동옥저, 예, 마한, 진한, 변진, 그리고 倭(일본)까지도 중국사의 일부가 돼 버린다.

이러한 <삼국지> 동이전의 기록방식은 중국 사서에 계속 이어졌으며, <주서(周書)>의 경우에는 고구려와 백제가 이역열전에 입전돼 있다.

그리고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부여, 고구려, 예, 마한의 경우 제천대회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10월에 제천의례를 지내는데 거국적인 대회이며, 동맹(東盟)이라 했다. 동맹제는 제천의례인 동시에 국조신에 대한 제의로서 양면성을 가진 것이다. 즉 하늘의 자손인 동명에 대한 제사의례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제천대회는 부여와 예 및 삼한사회에서도 이뤄졌다.

오직 황제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입장에서 볼 때 제후국이 아닌 다른 독자적인 정치체임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제천의례를 지낸 고구려와 부여 및 동예, 그리고 마한은 중국과 다른 천하관을 가진 독립국가였다는 것이 중국인이 남긴 당시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한편, ‘광개토왕릉비’를 보면 ‘천제지자(天帝之子)’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다. 그리고 ‘모두루묘지명’을 보면 ‘일월지자(日月之子)’라는 표현이 나타나 있다. 이는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표현으로 이를 통해서 고구려가 독자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중원고구려비에는 신라를 ‘동이(東夷)’라고 표현하고 있어 당시 고구려가 중국과 같은 황제국으로서 주변 나라의 정치체를 ‘동이’라고 불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50권 중에는 고구려본기가 10권으로 편성돼있는데, 이는 삼국의 역사를 하나의 역사체계로 인식했다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고구려사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편입시키기 위한 역사왜곡은 일본역사교과서 사건보다 더욱 심각하다. 왜냐하면 일본의 역사왜곡사건은 검인정 교과서 중에 하나인 ‘새로운 역사교과서’가 문제가 된 것이지만 중국의 역사왜곡은 중국의 정부기관이 나서서 진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사 뿐만 아니라 발해사와 고조선사까지 왜곡하고 있으므로 한국의 역사는 시간적으로 2000년 밖에 되지 않으며, 공간적으로 한강 이남으로 국한되게 되는 결과가 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국민들이 한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는 일이다. 고구려사를 비롯한 한국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한국 역사의 정체성을 올바로 정립해야 이 문제도 잘 해결될 것이다.

최광식 본교 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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