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본교가 개교 101주년과 남녀공학 60주년을 맞는 해이다. 이제 고려대학교의 여성교육 철학은 무엇인지 진지하게 검토하고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남녀공학의 목적이 단순히 기회균등의 차원에서 여성들에게 학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삭막하고 거친 남성 캠퍼스를 좀 더 부드러운 여성적 분위기로 바꾸자는 기대에서 여학생들을 받아들인 것도 아닐 것이다. 남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목표 역시 사회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유능한 인적 자원을 길러내는 일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여성교육에는 이 목적 이외에 추가되어야 할 사항이 있다. 성차별적인 고정관념이나 조직문화 등이 여전히 여성들의 사회적 성취를 방해하는 현실을 감안할 때 여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전문 지식과 정보만은 아니다. 남성보다 덜 우호적인 사회적 환경에서 살아가야 할 여학생들에게는 남학생들보다 더 많은 지원과 격려가 필요하다. 험한 세상과 싸울 수 있는 용기와 투지를 불어 넣어주고 성취동기를 자극하고 분명한 직업의식을 고취시키는 일 역시 대학의 중요한 과업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차별적인 사회 현실을 비판하고 개선하는데 앞장서는 고대문화가 조성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여성 특유의 인내와 부드러움으로 승부해라”, “어려운 취업 관문을 뚫으려면 남성들보다 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조언들은 분명 현실 적합성이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으로, 남성들보다 더 경쟁력을 갖춘 여성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사회구조의 문제점을 직시하면서 대학에서부터 양성평등적인 문화 혁신을 이루어내기 위한 고민과 실천들이 이루어져야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능력 발휘의 기회를 제한하는 사회는 불평등하다고 비판하려면 고대문화 자체부터 여성친화적인 방향으로 변화되어야 마땅하다.

1967년 본교의 여선배들은 남녀공학 대학들 중 처음으로 ‘여자교우회’를 발족시켰다. 이 모임을 만들었던 선배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발족 동기는 수적 열세 때문에 학창시절은 물론이고 졸업 후에도 겪어야 했던 외로움과 위축감이었다. 1946년부터 시작된 공학 초기 시절은 물론이고 70년대 말 필자가 학교를 다녔던 시절에도 “고대가 남녀공학이냐? 남자학교이지!”라는 말들이 거침없이 뱉어지곤 했다. 고대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 그것은 무수히 많은 여성 편견과 고정관념 때문에 상처받고 싸우고 지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제 수적인 의미에서 여학생들은 결코 마이너리티는 아니다. 그러나 2006년 캠퍼스를 누비는 고대 여학생들이 그들의 선배들이 느꼈던 소외감과 위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고 볼 수는 없다.

이제는 “어떻게 여자들보다 더 못하냐?”라고 남학생들을 나무라기보다는 여학생들이 앞서는 것을 기뻐해주는 교수님들과 “여성 인력은 키워 놓아도 오래 못 간다”라고 비판하기보다는 당당한 프로 근성을 훈련시키는 교수님들을 더 많이 만나고 싶다. “남자들도 자리 잡기 어려운 세상인데...”라는 식의 화법은 남자들끼리의 경쟁도 만만치 않은데 여자들까지 앞에서 걸리적거리지 말라는 주문처럼 들릴 수도 있다. 굳이 이야기하지 않아도,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이 결코 녹녹치 않은 현실임을 모르는 여성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는가? 여학생들은 그들을 낙담시키고 좌절시키는 충고보다는, 원해서 시작한 길이라면 세상 어려움에 굴복하지 말고 당당하게 성취하라는 격려를 더 많이 필요로 한다.

역사를 자랑하는 민족의 대학, 선후배 사이의 끈끈한 연대, 패기와 야성 등 고려대학교를 상징하는 화려한 수식어들 속에 이제는 ‘여성친화적인 고대문화’라는 단어를 합류시켜야 한다. 또한 한국사회에 일조할 수 있는 자신감 넘치고 능력 있고 책임감 있는 여성 리더들을 기르는 대학으로서의 사명감을 새롭게 해야 한다. 진정으로 ‘여성을 키우는 대학’으로 체질을 개선해야만 고대는 우리의 딸들도 다시 보내고 싶은 모교가 될 것이다. 고급 여성 인력을 기르는 일은 21세기 국가 경쟁력뿐만 아니라 고대의 경쟁력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다. 본교의 여학생 비율은 현재의 35%대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증가할 것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다방면에서 명실공히 리더로서 활약할 수 있는 여동문들을 많이 배출해내지 못한다면, 고대 발전은 심각히 지체될 것이다.

임인숙 문과대 사회학과 교수 · 젠더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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