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티셔츠도 팝아트프린트와 만나면 독특한 느낌을 주는 패션소품으로 변신한다.   
원색적이고 발랄한 분위기로 젊은이들을 사로잡아온 “팝아트 스타일”은 올 봄에도 여전히 인기를 끌 전망이다. 무심히 지나쳐왔지만 은근히 자주 접해온 팝아트는 어디서 연유하는 것일까? 팝아트의 근원을 따라가 보자.

팝아트 란? 
 

팝아트는 신문광고, 상업적인 간판, 만화, 영화 등의 대중문화를 소재로한다. 팝아트는 일상적인 것을 소재로하지만  팝작가들에의해 다양한 의미로 변주된다. 팝아트를 보는 관객은 자신의 경험치에 따라 ‘자기확인’혹은‘염증’을 느낀다.
팝아트의 범속한 소재에 대한 탐닉은 기존의 수직적 미술개념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상업주의 미술로의 경도는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팝아트는 현대 산업사회의 혁신적인 자기표현양식이었다.

팝아트의 표현은 강렬한 색체, 회화적인 붓자국의 결핍, 명확한 윤곽과 외형, 깊은 공간성의 억제를 추구하며 콜라주와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기존의 스케치, 밑그림, 뒷손질과 같은 전통적 기법의 번거로움을 간소화했다.

팝아트의 기원

팝아트는 1950년대 영국의 인디펜던트 그룹에 의해 시작된 미술사조이다. 인디펜던트그룹은 기존의 순수미술에 대항하여 대량생산된 도시문화, 영화, 광고, 공상과학소설, 팝뮤직을 진지한 미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이는 인디펜던트그룹이 모든 유형의 인간활동이 미학적 판단 및 관심의 대상이라고 전제한데서 기인한다. 인디펜던트그룹의 비평가 로렌스 엘로웨이는 산업문명이 만든 대중예술을 긍적적으로 보았으며 순수미술은 대중미술까지도 포함하는 확대된 구조를 지향해야한다고 했다.

더 깊은 기원: 다다와초현실주의-피카소 브라크  

   
그러나 팝아트는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것은 아니었다. 20세기초의 조르주 브라크와 파블로 피카소의 큐비스트콜라주(평평한 표면위에 이차원적인 재료를 붙이는것)는 팝아트의 상업적 인쇄물 차용의 원류였다. 이들의 순수미술에 대한 회의적이고 부정적인 태도, 불손하고도 인습타파적인 태도, 예술내에 모든 것을 용납하려는 태도는 팝아트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이 추구하는‘발견된 오브제’는 일상적이고 익숙한 사물일지라도 예술가의 선택에 의해 예술작품으로 태어나면 색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이다. 화장실의 ‘변기’를 떼어다 그대로 전시한 뒤샹의 <샘>은  이미지가 원래의 환경으로부터 이동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경이를 유발한다는 신념의 표현이었다.  

팝아트의 가교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에두아르도 파올로치는 다다·초현실주의와 팝아트의 가교였다. 파올로치는 “어떤 오브제든지 그것은 ‘복합적인 연상작용’을 촉발시키는 하나의 이미지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다” 라고 했다. 재료들을 거의 조작하지 않고 사용하지만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이전에 흔히 간과했던 새로운면을 인지하도록 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영국 팝아트
‘풍요’에 대한 동경으로서의 팝아트

현대미술에 대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장려하기위해 형성된 인디펜던트그룹은 전후 1950년대 까지 계속된 영국의 내핍생활을 경험한 세대였다. 이들에게 미국의 광고와 대중매체가 주입하는 풍요와 쾌락에 대한 약속은 매혹적으로 느껴졌을 것이다.

   
런던의 화이트 채플 미술관에서 열린 인디펜던트 그룹의 전시 〈이것이 내일이다〉에서 소개된 리차드해밀턴의<오늘날 가정이 색다르고 멋진 이유>는 팝아트의 전조였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대중문화목록’이었는데 이 작품 표제의 답은 이 작품속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즉 유성영화, 텔레비젼, 녹음기와 같은 테크놀로지가 우리의 도피처가 되어주며 진공청소기, 통조림, 햄 등 편리한 가정용품들이 소비자를 가사노동에서 해방시켰기 때문에 오늘날 가정이 색다르고 멋지다고 강변하고 있는것이다.

이작품은 대중잡지의 광고를 그대로 빌려와 재구성한 것이다. 이는 광고 본래의 ‘소비촉진’이라는 기능을 지니면서도 “미술작품”으로서의 새로운 위상을 부여받은 것이었다. 이 포스터의 풍부한 복합성을 통해 해밀턴이 포착한 문화의 속성은 대중적, 일시적, 소모적인것 이었으며, 저가이고, 대량생산되고, 사업성이 큰 것이었다. 이러한 요소는 얼마 후 팝아트가 즐겨 사용하는 소재가 되었다. 해밀턴은 예술가를 대중문화의 소비자이자 기여자로 보았는데 그 자신도 산업문화를 받아들여 이를 자신의 예술 속에 동화시키려 하였다. 

미국 팝아트

재스퍼존스와 로버트 라우젠버그는 미국 팝의 연결고리였다. 이들 역시 일상적인 소재에 주목하여 쉽게 지나쳐버리는 것을 의식하게 하는것이 예술이라고 보았다. 라우젠버그는 예술과 삶 사이의 틈에서 작업하기를 원했다. 이처럼 추상표현주의와 다다의 이상은 미국의 팝작가들에게도 좋은 영감을 주고 있었다.

예술은 상품?  
 

   
미국에서의 팝아트는 앤디워홀, 리크텐스타인에 의해서 본격화되었다. 미국의 팝아트 예술가들은 밝은 색채와 단순화한 디자인 간혹 공통적으로 채택되는 주제로 느슨하게 묶여져있었다.

앤디워홀은 “사업을 잘하는 것은 예술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이다. 좋은 사업은 최상의 예술이다”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했다. 소비가 개인의 경제적인 성공과 심리적인 행복의 측정수단으로 주입되던 시절, 팝아트 예술가들은 이러한 시류에 성공적으로 편승했다. 많은 팝작가들은 확대되는 시장과 관객들을 의식히고 이들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기업가처럼 행동했다. 팝아트에 재현된 물건들은 대중이 쉽게 구매할 수 있는것이었으며 실제로 매우 인기있는 상품이었다.  이는 팝작가들이 사업적 성공의 한 방편으로서 고객의 취향에 맞는 이미지를 도용하여 접근성을 높이면서도 ‘순수미술’이라는 고급스런 포장을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고 있는 것이었다.

상업주의에 경도된 팝아트에  대한 반발

그러나 이처럼 상업주의에 경도된 팝아트는 반발을 사기도 했다. 그린버그는 대량생산된 저질 오브제들이 예술로 유입되는 것을 경고했다. 그는 “팝아트가 광고의 자극적인 시각언어를 흉내내기 위해 강렬한 색채와 빽빽한 공간 그리고 상업 생산품 그 자체를 활용했다“고 지적했다. 그린버그는 팝아트가 “상품의 진부함과 통속성의 세계와 화해했다”고 했다.  힐턴 크레이머는 팝아트가 부르주아적 문화(상업주의)를 무차별적으로 수용하였으며 이로써 항의적인 전위예술과 결별 했다고 보았다.

팝은 ‘순진한 찬미’이기만 했을까?  

   
팝작가들은 소비상품, 대중매체, 명성과 향략주의에 대한 찬미와 아울러 아울러 부정적인 측면에도 관심을 가졌다.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인 팝아트는 세상의 집착에 순순히 가담하면서도 때론 문제의식을 갖고 각성의 역할도 수행했던 것이다.

유명인사들에 대한 영구화 내지 조작에 깊게 관여한 앤디워홀은 명성과 성공에 대한 관심이 지대했다. 워홀의 작품들은 스타로서의 역할이 일용품으로 대체되어지는 느낌을 주어 왠지모를 애잔함을 자아낸다. 워홀은 1962년 먼로의 죽음을 계기로 더욱 그녀를 기념할 필요성을 느꼈다. 먼로가 절정기때의 사진을 이용한 워홀의 작품은 당시 섹스심벌이던 그녀의 판에박힌 이미지 이면에 존재하는 언론에 의한 폭력적인 사생활침해의 어두운 결말을  효과적으로 보여주었다. 팝아트는 자살한 먼로를 “기념”하는 것을 통해 명성 이면에 내재한 사생활의 침해라는 부정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워홀의<미국에서의 죽음>연작은 팝아트의 사회비판적시각을 확인할 수 있다.자동차사고, 자살 , 버섯구름, 전기의자를 묘사한 이작품에서 ‘망가진 자동차’는 도로질주의 쾌감과 성적인 암시를 감소시켰고 ‘자살’은 삶의 절망을 적시함으로서 건강과 행복을 담보하는 미디어의 허상을 꼬집었다. ‘버섯모양구름’은 원폭의 포화를 상징하는데 쿠바사태때 또다시 사용될 뻔 한 핵무기에 대해 암묵적으로 저항하는것이었다. 사형제도를 상징하는 전기의자는 사형제도의 비인간적 면모를 들어냈다. 

팝작가들의 배경

   
영국과 미국팝의 구심점은 이들이 모두 이민가정출신의 노동계급문화를 공유했다는 점이다. 만화책, 대중잡지, 할리우드영화가  이 작가들을 양육했던 시각문화의 주요 구성 인자였다. 이같은 문화요소들은 전후에 내핍한 영국작가들에게 동경의 대상으로서 팝회화의 소재가 되는 한편 이미 풍요를 경험한 미국작가들에게는 찬미의 대상이 되었다. 

팝작가들은 복합적인 현상을 표현하기 위해 구체적이고 강렬한 이슈에 집중했으며 통속적인 것을 미술관으로 옮겨와 ‘삶’을 미화했다. 팝은 물질적 풍요를 “기념”하면서도 종전 후 급격한 변화와 모순들을 “기록”했다. 기념은 찬미적 이지만 기록은 의식적이다. 풍요와 빈곤, 세계를 멸망 혹은 진보시킬 수 있는 미국의 능력- 팝작가들은 이러한 미국의 모순을 인식했었다. 팝아트는 대중에게 친숙한 스타일로 다가와 시대를 점검하고자 애썼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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