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교(華僑)란 본국을 떠나 해외 각처로 이주하여 현지에 정착, 경제활동을 하면서 본국과 문화·사회·법률·정치적 측면에서 유기적인 연관을 유지하고 있는 중국인 또는 그 자손을 일컫는다.

현재 국내에 머물고 있는 화교는 약 2만4000여 명이며 이들을 한국화교, 줄여서 한화(韓華)라고 지칭한다. 한국화교(이하 한화)는 한국에 뿌리를 내리고 살고 있지만 외국인의 신분이다. 6?5 전쟁 직후에 중국과의 교류가 없었기에 한화 대다수는 타이완(臺灣) 국적을 갖고 있다.

한화의 역사는 1882년 임오군란 당시, 청나라 군대를 따라 인천에 상륙한 청나라 상인 40여 명으로부터 시작된다. 대다수가 타이완 국적임에도 불구하고 한화의 95% 이상은 중국대륙 동부 산둥성(山東省) 출신이다. 이는 1898년 의화단의 북청사변으로 산둥성 일대가 전란에 휘말리자 그들이 피난지로서 가까운 한국을 택해 대거 유입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20세기 초 소농경제의 몰락으로 산둥성의 농민들이 한국으로의 이민을 통해 생존을 모색했다. 산둥성 중국인들의 계속적인 유입으로 한화는 1942년에는 8만30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일제의 한국인과 한화의 이간질, 태평양전쟁 발발 등으로 한화의 숫자는 계속 줄어 6·25 전쟁 직후 한화의 숫자는 2만5000여 명으로 줄게 된다. 1976년 3만2436명이 될 때가지 한화는 더 이상의 유입도 유출도 없이 자연 증가했다.  [참고 그래프]

그 후, 1960∼1970년대 이승만·박정희 정권을 거치면서, 한화의 1만이 떠난다. 외국인 경제활동 규제정책과 한화에 대한 불합리한 각종 제한 정책 때문이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중국음식점에 불리한 세율을 적용했으며 외국인 토지소유 금지법, 외국인 토지취득 및 관리에 관한 법 등을 통해 화교의 경제활동을 제한했다. 또한, 두 번의 통화개혁은 현금 소지를 좋아하는 화교들의 화폐를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게다가 1970년대 이후 서구 선진국으로의 이민이 다소 자유로워지면서 한화들은 대거 국적국인 대만이나 미국, 캐나다, 호주 등지로 이주했다.

1990년대 들어 한화의 여건은 다소 나아졌다. 1992년 중국과의 수교로 한화들의 경제적 지위가 다소간 향상됐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도 한화 55%가 요식업이나 요리사직에 종사하는 등 자영업 중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긴 했지만, 중국과의 수교이후 여행업 등에 진출이 늘었으며 중국과 한국 사이의 무역을 담당하고 있기도 하다. 그리고 1997년 한국이 IMF 관리체제를 맞으면서 해외 화교 자금력이 필요하게 되면서, 화교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기도 했다.

이제 한화는 제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곳곳에서 차이나타운의 건립 얘기가 나오고 있으며 한화의 지위 향상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한화를 계속해서 우리 사회의 이방인으로 방치할 수는 없다. 한화는 분명 우리 민족과 함께 우리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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