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 세월 동안 섬은 늘 거기 있어 왔다. 그러나 섬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섬을 본 사람은 모두가 섬으로 가버렸기 때문이다. 아무도 다시 섬을 떠나 돌아온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청준의 소설 <이어도>는 이렇게 시작된다. 우리가 소설로만 접했던 전설의 섬, 이어도는 오래전부터 제주도 사람들에겐 배고픔도, 고통도 없는 이상향이었다. 뱃사람들은 생계를 위해 두려움을 애써 참으며 바다로 나갔다. 아내들은 그들이 돌아오지 않으면 이어도로 갔다고 믿었다. 그들에게 이어도는 구원의 섬이자 희망의 섬이었다.
이어도의 좌표는 동경 125도 10분 56.81초, 북위 32도 7분 22.63초. 하지만 그곳에 이어도는 없다. 아니, 눈에 보이는 ‘섬’은 없다. 좌표까지 있는 이어도가 전설의 섬인 이유는 물속의 섬, 수중암초이기 때문이다. 지난 1900년 영국 상선 소코트라호가 이어도에 부딪혀 좌초되면서 이어도는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전설이 현실이 된 것이다. 이어도의 꼭대기는 수심 약 4.6m에 잠겨있다. 그래서 파도가 높은 날에만 겨우 모습을 드러낸다. 유난히 높은 파도가 잦은 이어도. 그래서인지 이어도의 별명은 파랑도(波浪島)다.
지난 2003년 이어도 꼭대기에서 북쪽으로 약 700m 떨어진 지점에 한국의 과학기지가 세워졌다. 제주에서 헬기로 1시간 이상 날아가면 만날 수 있는 ‘이어도 종합해양과학지기’다. 전설의 섬이 세계의 기상·해양과학의 중심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봄빛 가득한 제주에서 한국해양연구원의 심재설 박사, 해경을 비롯한 8명의 일행이 헬기를 타고 망망대해를 가르며 날아간 지 1시간 남짓. 거친 파도와 바람을 맞으며 우뚝 서있는 커다란 철골구조물이 눈에 들어온다. 석유시추선을 닮은 ‘이어도 종합해양과학지기(이하 이어도 기지)’다.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일행을 덮치는 거친 바다바람과 발밑으로 넘실대는 검푸른 파도에 정신이 바짝 든다. 선박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는 등대 옆에서 힘차게 펄럭이는 태극기를 보니 ‘여기도 우리 땅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조금은 안심이 된다. 난간을 꽉 잡고 내려가자 이어도 기지에서 필요한 전력을 생산하는 태양전지판이 햇빛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계단을 내려가, 힘겹게 들어간 메인데크 내부에는 기지의 두뇌 역할을 하는 관측실을 비롯해 화장실, 부엌, 수면실과 회의실이 마련돼 있다. 인터넷과 텔레비전도 사용할 수 있다. 이어도 기지는 특별한 때를 제외하곤 무인(無人)으로 운영된다. 하지만 기지에는 비상시를 대비해 8명이 최대 2주가량 머물 수 있도록 식료품과 침구 등이 항상 준비돼 있다. 안내를 담당한 심 박사는 “이어도 기지에 점검하러오면 낚시를 자주 하는데 운이 좋으면 싱싱한 우럭을 잔뜩 잡을 수 있다”며 거센 바다바람에 놀란 일행의 긴장을 풀어줬다. 국립해양조사원의 안장현 주무관도 “기지에서 부엌일은 항상 막내인 내 몫”이라며 “가끔은 자장면을 시켜볼까 진지하게 고민한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난 2003년 6월, 8년 만에 완공된 이어도 기지는 무게 2200t, 높이 36.5m의 인공구조물이다. 기지는 총 400평 규모로 헬기 이·착륙장, 주거 및 관측을 위한 메인데크, 각종 장비와 설비가 모인 하부데크의 3개 층으로 구성돼 있다. 이 기지를 바다 밑바닥에 뿌리박고 있는 네 개의 기둥이 지탱하고 있다. 물 아래 가려진 부분까지 합치면 기지의 높이는 77.5m로 아파트 30층과 맞먹는다.

사실 이어도 기지를 만들기 위해 기반조사를 할 때만 해도 관계자의 70%가 건설을 반대했다. 이어도 근처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설정 문제로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이 불거지고 있었고 건설비용도 엄청났기 때문이다. 더구나 기지예정부지의 지반은 겉만 암석이고 속은 모래와 뻘이었으며 주변의 파도도 너무 높아 최악의 건설조건이었다. 하지만 심 박사는 “이제는 반대했던 사람들 중 90%가 기지를 칭찬한다”며 “이걸 보면 완공 당시 뿌듯했던 감정이 되살아난다”고 메인데크 입구의 현판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이어 심 박사는 “이어도 기지는 폭풍의 길목에 위치한 세계 유일의 기지로 그 가치가 귀중하다”며 “해양과 기상현상의 단순한 관측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연구를 통해 다목적 기지로 거듭날 것”이라고 앞날을 예상했다.

우리나라를 통과하는 태풍의 40%가 이어도 해역을 통과해 8~12시간 후 한반도에 상륙한다. 이어도 기지에서 채집된 태풍 정보는 태풍의 세기와 진행 방향, 피해 정도를 정확히 예상하는 데 꼭 필요한 정보다.

기지의 구석구석을 살피던 중, 파도가 넘실대는 발밑의 바다를 쳐다봤다. 이어도 기지 근처의 바다는 제주에서 출발할 때 헬기에서 내려다 봤던 바다와 달랐다. 뿌옇고 탁한 것이 마치 서해바다 같았다. 심 박사는 “겨울에 갑자기 물이 탁해지는데 양자강 등에서 퇴적물이 내려오거나 이어도 근처에서 퇴적물이 생성되는 것으로 보인다”며 “이것도 중요한 연구테마”라고 말했다. 심 박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안개로 흐릿한 수평선 근처에 배 한척이 보였다. 이 먼 곳까지 어업을 나온 중국어선이란다.

기지 탐사를 마치고 메인데크의 회의실에서 점심식사를 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이어도에서의 만찬이었기 때문일까. 비록 차가운 김밥과 음료가 전부였지만 일행은 헬기에서 혹시나 화장실을 걱정해야 할지 모르니 조금만 먹으라는 농담을 주고받으며 즐거운 휴식을 즐겼다. 안 주무관은 “이곳에 오는 분들은 바다에 대한 애정이 많다”며 “해양학이 많이 알려지지 않아 대학생들의 관심이 적다”고 아쉬워했다.

두 시간의 짧은 만남을 뒤로하고 헬기는 기지에서 멀어져갔다. 점점 작아지는 기지를 바라보며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데 기지에서 조금 떨어진 쪽빛 바다 속에 손톱만한 푸른 점 하나가 보였다. 남편 잃은 아내들의 한 맺힌 곡조가 파도에 부서지던 전설의 섬, 이어도. 세계적 과학기지로 다시 태어난 이어도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는 싱그러운 바다향이 가득한 봄바람이 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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