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삶은 속도전이다. 무한경쟁 시대에 사는 우리는 매순간 경쟁하며 남보다 더 먼저, 더 빠르게 행동하기를 강요받는다. 이런 흐름 가운데 전통방식을 추구하며 여유로움에 주목하는 운동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처음 시작된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이 바로 그것이다.

슬로시티 운동은 1986년 이탈리아 북부의 소도시 브라(Bra)에서 시작된 슬로푸드 운동의 발전적 형태다. 슬로시티는 지역성·전통성에 기초해 지역민의 삶의 질을 향상하기 위한 대안적 지역발전 모델이다. 최근엔 슬로시티가 농촌 지역의 자생력 확보를 위한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지난 1999년 이탈리아 4개 도시가 슬로시티를 선포하며 본격적인 슬로시티 운동이 시작됐다. 슬로시티는 효율성과 속도 지상주의에서 자연적인 삶으로 복귀해 지속적인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에 대부분의 슬로시티에선 지역의 특산물과 친환경 농산물의 생산과 소비를 장려해 지역발전을 이룬다. 이탈리아 오르비에토(Orvieto)는 광장에서 주 2회 재래시장을 열어 전통적 상업기능을 유지하고 도심의 활성화를 유도하고 있다. 또한 지역의 모든 농산물을 유기농으로 수확해 △가정 △학교 △카페테리아 등에 슬로푸드로 제공한다. 지역 내 장인들을 보호하고 그들의 생산방식과 생산품을 존중하는 것도 슬로시티의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슬로시티 공식마크
슬로시티엔 슬로시티 국제연맹이 제시하는 조건과 공통 활동목표에 적합한 지역만 선정될 수 있다. △인구가 5만 명 이하인 지역 △자연생태계가 철저히 보호된 지역 △지역주민이 전통문화에 대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지역 △유기농법에 의한 지역 특산물이 있는 지역 등 조건이 까다롭다. 현재 슬로시티로 인증 받은 곳은 △이탈리아 △영국 △독일 △스페인을 포함해 총 17개국 123개 도시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7년 12월 아시아 최초로 전라남도의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도 △장흥군 유치면 △담양군 창평면 등 4개의 지자체가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이어 지난 2월엔 경남 하동군이, 지난 17일(목)엔 충남 예산군 역시 슬로시티로 추가 지정됐다. 담양군 문화정책과 장영기 씨는 “해당지역의 예스러운 것을 유지하고 지역주민들의 한가로운 생활을 보장하는 것이 슬로시티의 취지”라며 “지자체에선 마을의 지역성과 전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예산을 지원하고 있다”고 말했다.

슬로시티 운동은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추진하는 운동이긴 하지만 이를 지원하는 위원회나 단체의 역할도 중요하다. 영국은 지방의회 내에 △지방의회의원 △각종 단체의 대표자 △상위정부 관계자들로 구성된 슬로시티 소위원회가 있어 슬로시티 추진활동을 공공정책에 반영할 수 있다. 우리나라도 지난 2007년 12월 한국슬로시티본부(위원장=손대현·한양대 관광학부)가 조직됐다. 한국슬로시티본부에선 △후보지 인증 추천 △대외적 홍보 △한국슬로시티와 국제슬로시티 간 네트워킹 강화 △슬로푸드 운동 확산 등을 맡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슬로시티 추진과정은 해외사례와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해외의 경우 지역 내 다양한 단체들이 모여 슬로시티로 지정받기 위해 오랜 기간 준비한다. 이에비해 우리나라에선 행정기관 주도하에 단기간에 슬로시티 인증을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슬로시티가 지역주민의 참여가 미비한 상태에서 인증된 만큼 해당지역 주민들의 참여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한국토지공사 국토도시연구원의 최대식 연구원은 “어떻게 슬로시티로 지정받느냐보다 슬로시티를 어떻게 구현하는지가 관건”이라며 “지역주민들이 스스로 슬로시티적인 생활을 구현하도록 지자체가 돕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지역의 특색과 상황에 맞는 응용형 슬로시티 활동도 요구된다. 오래된 성곽도시인 이탈리아 오르비에토는 전통적 도시미관과 생활환경을 보호하기 위해 네온사인 설치를 지양하고 모든 종류의 소음유발을 법으로 제한하고 있다. 영국 러드로우(Ludlow)에선 상당수의 상점들이 가업을 이어 운영되고 있다. 신안군 문화정책과 직원 박관호 씨는 “증도면은 가로등 불빛의 조도를 낮추고 네온사인을 없애 어두운 밤하늘과 별빛을 볼 수 있게 하는 ‘다크스카이’를 시행하고 있다”며 “지역의 특색을 살리며 응용형 슬로시티를 구현하기 위해 계속적인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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