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학과 황현산 교수께서 8월 말로 정년퇴임을 맞이한다. 그간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특강이 마련되었으며, 한국번역비평학회가 선생님께 헌정하는 학술행사를 개최하였다. 감사의 마음을 표하고자 기획된 시인들의 퍼포먼스도 한 창 준비 중에 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자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예고에 불과할 것이다. 올해 들어서만도 발터 벤야민의 글과 기욤 아폴리네르의 시집을 번역 출간한 걸로 미루어 짐작해 보건데, 평생을 다독거려온 것임에 분명한, 보들레르와 랭보의 시집도 예의 그 꼼꼼한 주석과 해설을 곁들여 조만간 세상에 선보일 것이며, 고약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선언도 원고를 마무리하고, 역주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알기 때문이다.

저 난해하다는 상징주의 시를 빠짐없이 읽어낼, 유일하다고 해도 좋을 불문학자나 프랑스문학이 국내에 유입된 이후 일구어낸 저간의 맥락을 우리문학의 보편적 역량을 헤아려 가늠해낸 탁월한 비교문학가라는 이름도, 말라르메의 시를 한 줄 한 줄 결곡한 해설을 곁들여 우리말로 선보인 빼어난 번역가라는 이름도, 허나 황현산의 학문적 면모를 상징하는 그 끝은 아니다. 문학비평가 황현산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비평가 황현산은 오랜 전설이나 다름없었다. 젊은 시인들의 열정으로 가득한 새로운 실험을 섬세하고도 살갑게 읽어내며,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의 작품들에 기꺼이 해설문을 달아 세상에 내보낸 평론가를 나는 황현산 이외에 잘 알지 못한다.

제자로써 모신 적은 없으나, 문단에서의 인덕과 그 평문의 명성은 학교에서 뵙기 훨씬 전, 내게는 대학시절 이미 먼발치의 거산이었다. 이문재 시인이 말한 것처럼, 평론가 황현산은 그 글의 젊음 때문에, 그 글이 실어 오는 인식의 트임 때문에, 간혹 문단에서 질투의 대상이 되기도 하지만, 이 질투에 부러움이 섞여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 부러움도 따지고 보면 이게 끝이 아니다. 어떤 교수가 정년에 임박해서, 그간 재워놓은 제 글과 번역을 이토록 맘껏 뿜어낼 수 있을까? 날을 한껏 벼려놓은 칼을 높이 치켜들고서 전투에 임한다고 해도 좋을 당당한 위세는 그런데 왜 정년에 임박한 지금에서 또 다시 절정을 맞이하는가? 나는 여기서 한 학자의 자신감은 노력의 소산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교수로서의 최소한의 명예를 지켜내자는 소박한 생각을 성실한 자세로 정년까지 견지해 내는 건, 짐작하는 것만큼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자신감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며, 아무 때나 감지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문학이 제 삶을 살아온 만큼, 아니 문학이 만들어낸 세월의 두께에 한껏 조응하고 문학이 파놓은 저 깊이를 가늠하고자, 한시도 그 긴장의 자락을 놓지 않을 때, 그리하여 문학과 함께 불멸의 밤으로 한평생을 지나올 때 비로소 생겨날 법한 무엇이 이 노장 학자의 얼굴에 당당하게 배어있다. 외국문학과 한국문학의 구분이 헛되다는 것을, 문학은 결국 하나라는 사실을 비평가 황현산은 안과 밖의 섞임과 그 통로를 짚어내는 혜안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귀해 대학원 수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열 시진을 생각하느니 한 시진을 배우는 게 낫다던 순자의 말이 절실히 다가왔던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학생들에게 자신감을 주는 수업, 시를 읽어낼 힘을 길러주고, 자기 성찰로 문학을 돌보게 해주는 그런 수업은 지금도 진행 중이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간의 글들을 모은 평론집도 곧 독자를 찾아갈 것이며, 신문 칼럼이나 문예지의 연재도 무람없이 진행될 것이다. 세상과 무관하지 않았던, 문학과 함께 세상을 호흡하면서 일구어낸 곡진한 그 길에서 뿜어 나오는 천연한 광채는 오늘날 왜 인문학이 지속되어야 하는지 그 가치를 되묻게 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캐묻게 하고도 너끈히 남음이 있다. 퇴임은 단지 허울에 불과하다. 연구는 지속될 것이며, 평론은 넘쳐날 것이고, 번역은 미래의 시간을 불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조재룡 문과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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