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랑혜윤 인문대 교수·영어영문학과
대학시절, 교수님들 연구실을 지날 때마다 ‘나도 이런 연구실이 있었으면’하고 꿈꾸었다. 어머니는 늘 내가 교육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까지만 해도 나는 영문학 분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영문학은 나의 두드림에 늘 답이 없는 듯했고, 나는 이 답답함을 주변 사람들에게 털어놓았다. ‘나’라는 사람을 정말 잘 알던 중학교시절 친구가 ‘네 적성엔 영어학이 더 잘 맞는 것 같아’라는 조언을 해주었고, 이 조언은 내 귀에 쏙 들어왔다. 막상 대학원에 진학하여 영어학을 공부해보니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것도 있구나’ 싶었다. 매일 사용하는 ‘언어’에 대해 나는 예전에는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소크라테스는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다’라고 정의했다(호모 로쿠엔스). 그렇게 동물과 인간을 차별화하는 언어를 나는 어렸을 때 어떻게 습득했을까? 나는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그 무한한 수의 문장을 만드는 법을 배웠을까? 나는 한국인이라 한국말을 하는 걸까 아니면 한국에 태어나서 한국말을 하는 것일까? 한국어와 다른 언어는 어떤 면에서 동일하고 어떤 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일까?    

그렇게 나의 언어학도-정확히 말하면 통사론자-의 길은 시작되었다. 지도교수의 권유에 따라, 남편이 재학중이던 예일대와 같은 주에 속한 코네티컷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Uconn Huskies라 부르는 대학농구팀으로 잘 알려진 이 학교는 주도 하트퍼드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스토스 전원지역에 주 캠퍼스가 위치한다. 100여 년 전 조그만 농업학교로 시작하여 현재는 미국 뉴잉글랜드지역 주립대학교중 가장 큰 대학교로 자리매김했으며, 해마다 미국 대학 순위를 발표하는 U.S. News에 의하면 미국 뉴잉글랜드지역 주립대학교중 1위를 기록하고 있다.

당시 지도교수였던 라스닉 교수님은 말하는 속도가 무척 빠르셨고, 기존이론에 대한 반례가 되는 문장자료를 곧잘 제시하셨으며, 그 끝엔 늘 질문을 하셨다. 학생들은 항상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 분에게서 나는 ‘생각하는 법’을 배웠다. 논문심사위원이었던 사이토 교수님은 유창한 영어실력으로 기존이론의 핵심을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해주셨다. 이 분에게서 나는 학문을 하는데 꼭 필요한 ‘쳬계성과 논리성’을 배웠다. 매주 목요일이면 우리 Uconn 학생들은 삼삼오오 모여 카풀을 마련하고 자동차로 약 1시간 40분 떨어진 MIT에 노암 촘스키 교수의 강의를 들으러 갔었다. 미서부쪽에서 매주 비행기를 타고 왔던 칼 존슨 교수와 같은 유명한 언어학자들을 포함하여 언어의 신비를 알고자 하는 100여명의 학도들로 강의실은 늘 붐볐다. 우리 학생들은 촘스키의 심오한 강의와 유명한 언어학자들의 날카로운 질문에 감탄했으며, 돌아오는 차안에서 늘 그날의 강의에 대해 토론하곤 했다. 매학기 말 어느 선배 논문이 마침내 통과되면 학과장님 집이거나 어느 학생 집에서 가족동반 파티를 했다.  우리 학생들은 이 시간을 제일 좋아했는데, 각국 학생들의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었고, 교수님들도 이날만큼은 그저 평범하게 우리와 같이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어주셨기 때문이다.         

스토스의 겨울엔 눈이 많이 왔다. 어느 날엔 1m가량 내린 눈 때문에 현관문을 열 수 없던 때도 있었다. 그렇게 눈이 많이 내리던 어느 겨울방학에, 학회발표논문을 위해 논평을 받고자 라스닉 교수님께 이메일로 면담을 신청했다. 그런데, 당시 MIT에 계셨던 교수께서 그 먼 길을 오로지 학생과의 면담을 위해 이틀내로 오셨다. 그때 내가 받은 감동이란... 나는 위대한 학자로서의 교수님이 아니라 진정한 교육자로서의 교수님의 면모에 진심으로 감탄했다.

긴 세월이 흐른 뒤, 나의 유학시절을 되돌아볼 때, 그래도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바로 눈 많이 내리던 그 해 겨울의 감동이다. 그렇게 세계적인 명성을 지녔던 분이 한 유학생의 작은 요청을 그렇게 크게 생각하고 기꺼이 논평하려 와주셨다. 몇 해 전 한국 국제학회에 방문하셨던 라스닉 교수님은, 10여명의 한국제자들에게 둘러싸여, 조그만 Palmtop을 꺼내셔서, 너무나 자랑스럽고 신이 난 목소리로, 이제까지 교수께 학위를 받은 학생들의 명단과 논문제목을 보여주셨다. 그렇게 한 학생 한 학생 모두에게 애정과 자부심을 가지고 계신 그 모습이 우리시대 대학교육에 진정 필요한 참교육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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