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차게 시작했던 새로운 밀레니엄이, 그저 어느 해나 다름없는 2001년으로 바뀌어가던 어느 겨울. 나는 미국 대학원으로 유학 지원을 해 두고, 초조하게 결정을 앞두고 있었다. ‘지원서를 보낸 많은 학교들 중 한 곳만이라도 나를 불러주었으면……’ 하던 당시의 심정은 곧 입학을 허가해 준 몇 개 학교들 중 한 곳을
‘인디언들이 버팔로를 어떻게 잡았는지 아느냐? 버팔로 떼를 벼랑 끝 한쪽으로 몰아서 앞선 녀석이 벼랑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고서도 멈출 수 없게 만들어서 버팔로를 잡았단다’. 97년 졸업을 앞두고 군대도 대학원 진학도 어떻게 결정해야 할지 모르고 망설이던 한 공대생의 인생을 크게 바꾼 결정적인 말이었다. 사실 수업은 꽤 지루했었고, 그
일본사람이 무서워하는 것은 첫째가 지진, 둘째가 화재다. 그만큼 지진이 많은 나라다. 처음에는 신기하기만 하던 지진이 공포로 다가온 것은 일본생활에 익숙해질 무렵이었다. 새벽에 집 전체가 크게 흔들리는 느낌에 정신을 차려보니 이것이 바로 지진이었다. 조립식 서가를 벽에 나사로 고정시켜 두질 않았더라면 잠자는 내 위로 넘어졌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했
대학시절, 교수님들 연구실을 지날 때마다 ‘나도 이런 연구실이 있었으면’하고 꿈꾸었다. 어머니는 늘 내가 교육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대학교 4학년 여름방학까지만 해도 나는 영문학 분야로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토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던 영문학은 나의 두드림에 늘 답이 없는 듯했고, 나는 이 답답함을 주변 사람들에게
2000년 여름, 유학의 부푼 꿈을 안고 도착한 곳은 미국 텍사스주의 주도 오스틴이었다. 대학도시로 발달한 역사 때문인지, 오스틴은 보수적인 텍사스의 다른 지역과 달리 자유롭고 개방적인 분위기의 도시였으며 외국인에게도 무척 친절한 살기 좋은 도시였다. 미국 내에서도 가장 규모가 큰 주립대 중 하나인 텍사스오스틴대(the University of Texas
하버드 대학이 있는 케임브리지를 떠나온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유학기를 쓰며 추억하기는 실감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갑자기 그립기도 하고 그런 시절이 있었나 할 정도로 오랜 일로 느껴지기도 한다. 아마도 즐거운 일과 힘들었던 시간이 중첩되어 그런 것 같다. 미국의 도시이지만 유럽풍이 엿보이는 보스턴과 찰스강을 경계한 케임브리지는 그 규모는 작지만 하버드를
유학생활은 그 끝을 알 수 없는 어둡고 긴 터널을 통과하는 것과 같다. 그 터널의 끝이 있기나 한 것인지, 있다면 도대체 언제쯤 끝이 날 것인지, 끝이 난다면 거기에는 어떤 운명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인지... 학업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졸업장을 받고 직장을 구하는 그 순간까지 이런 불확실성은 유학생들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어떤 사람들은 불행히도 이런 불확
나와 스페인과의 인연은 망아지와 시인 사이의 우정을 노래한 산문시집으로 시작되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 ‘세비야의 물장수’에 매혹되어 미학을 전공하려고 했던 내가 그 시를 만났을 때, 시와 회화의 주인공이 모두 스페인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저 우연으로만 느껴지지 않았던 것 같다. 당연히 이러한 예술가들을 탄생시킨 나라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
1995년 8월 영국 캠브리지 외곽에 있는 거처에 짐을 풀면서 내 인생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나의 유학생활이 일 년 이상 지속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일 년 동안 캠브리지 대학에서 방문학자로 연구 활동을 마치면, 귀국하여 준비중이였던 박사논문을 마무리 지을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문학을 전공하는 내게 고색
저는 85학번 고대여자입니다. 고대와 저의 인연은 이른 1985년 겨울 입학원서 접수 마감일늦은 오후에 시작됩니다. 평생 처음 고대를 방문했던 저는 고만 어둑어둑해진 캠퍼스에서 길을 잃었는데 그 낯설던 교정 반대편에서 마침 걸어오던 어른같이 뵈던 두 명의 고대 남학생이 초조해하며 길을 묻던 제게 친절하게 갈 길을 일러주었습니다. 고마움에 가득 차서 인사하고
나는 연세대학교 신학과 출신 고려대학교 체육교육과 교수다. 내 학부 전공만큼이나 내 유학“기”는 아마 전통적인 대학원 공부를 마치고 오신 교수님들과는 사뭇 다를듯하다. 나는 대학시절 내내 미래에 대한 걱정과 직업에 대한 혼란 속에 지냈다. 그러다 당시 꽤 인기가 있던 영화 “제리 맥과이어”속 주인공처럼 스포츠에이전
학부시절 단 한 번도 고려하지 않았던 대학원 유학을 결심하게 된 이유는 1년간의 교환학생 경험 때문이었다. 교환학생 시절은 우리와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즐거움을 주었고 이를 계기로 졸업 후 학부 교환학생 대학이었던 사이먼프레이져 대학(Simon Fraser University)의 커뮤니케이션 석사과정으로 진학하게 되었다. 석사과정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한국
퍼듀는 미국의 중서부의 인디애나에 위치하고 있고, 계절은 우리나라와 비슷하나 겨울에 조금 더 춥고 눈이 많이 내리는 곳에 위치해 있다. 흔히들 퍼듀에 가면 공부밖에 할 것이 없다고 하는데, 아마도 옥수수밭 한가운데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우리나라 면적의 세배 도 넘는 곳에서 주로 옥수수를 키우고 있으니, 콘푸레이크의 원조가 되는 곳이라고 하여도 놀랄 일
나는 국어국문학과 교수다. 국어국문학과 교수인 내가 유학을 했다는 사실은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유발하는 것 같다. 나 또한 석사 논문을 쓰기 전까지 유학은 남의 일이라고 생각했으니 사람들의 이러한 반응이 이상한 것은 아니다. 그럼 내가 왜 유학을 하게 되었는지부터 얘기해 보겠다.나는 대학원에 진학해서 국어학, 그 중에서도 한국어의 말소리를 연구하는 음운론을
요새 들어 더욱 자주 신문과 방송을 통해 “나노”라는 말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은나노를 이용한 세탁기도 있고, 침대에도, mp3 플레이어나 랩탑컴퓨터 등 수 많은 신제품에 나노라는 이름을 붙여서 획기적인 상품인양 말하는 것이 유행인 것처럼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나노(기술)이란 정확히 뭘 뜻하는 걸까요? 그것은 대략 100 나노미터 이
여러분 사회공학(社會工學, Social Engineering)이란 전공이나 학문분야에 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요? 아직도 국내대학이나 대학원에서 사회공학이란 학문분야는 생소할 뿐만 아니라 그 유형을 찾아보기 쉬운 전공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사회공학이란 학문은, 사회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지식(knowledge)과 공학(工學)의 실천적인 지식(知識)을 조합하
나의 유학시절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이미 30년전의 일이 되고 말았다. Cathay Pacific을 타고 런던을 경유하여 독일의 쾰른-본 공항에 내린 것이 1982년 3월이었다. 쾰른 대성당 앞에서 호기심어린 눈으로 여기저기 쳐다보는 사이 600마르크를 소매치기 당하고 서야 정신을 차리고 일단 라인강변 호텔에서 첫밤을 보냈다. 백지어음의 상관행이 숙성되고 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