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윤태 인문대 교수·사회학과.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어도 살 수 있을까? 웬델 베리는 대학에서 강의하다가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미국 작가이다. <나는 컴퓨터가 필요없다>는 제목의 글에서 현대 과학기술과 컴퓨터를 비판했다. 그는 컴퓨터가 없는 삶이 더 낫다고 주장했다. 아직도 1956년에 만든 타자기를 사용한다. 그가 컴퓨터를 사지 않는 이유는 컴퓨터에 필요한 전력은 자연의 질서를 거스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불빛이 필요 없는 낮에만 글을 썼다. 실제로 우리가 사용하는 전력은 엄청난 화석 연료를 사용한다. 그는 인간이 편리한 생활을 위해 자연을 파괴하는 것은 진보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나아가 성장, 효율성, 풍요를 추구하는 산업 문명이 인간의 본성과 자연을 파괴하고 있다고 고발한다.

더 극단적 사고. 1970년대부터 우편물 테러를 감행한 카진스키 전 버클리대 수학과 교수는 거대자본과 과학기술이 지배하는 산업문명을 거부하며 과격한 폭력으로 맞섰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나바머'라고 불리는 카진스키의 테러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웬델 베리처럼 살기도 어려울 것이다. 정말 우리가 산업혁명과 정보혁명의 이전의 시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 영국의 산업혁명 당시 기계를 파괴했던 러다이트 운동처럼 컴퓨터 파괴운동이나 인터넷 없는 세상을 만드는 운동이 얼마나 반향을 일으킬 것인가?

1980년대 미국의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권력이동'에서 정보혁명이 인간의 삶을 혁명적으로 바뀔 거라고 예언했다. 컴퓨터와 로봇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면 노동자의 생활이 개선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면 왜 일자리는 줄어들고, 노동시간은 많아지고, 사람들의 삶은 더 힘들어졌나? 제레미 리프킨은 '노동의 종말'에서 정보기술이 도입되면서 미국 은행의 일자리 3분의 1이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한국의 공장에서도 자동화가 확산될수록 일자리가 사라졌다. 모든 가정에서 컴퓨터를 구매하는 시기에 평생직장은 사라지고 고용불안은 커졌다. 장기적 신뢰관계 대신 단기적 이해관계가 지배한다. 개인이 살아온 과거에 대한 관심보다 미래의 유용성만 따진다. 노동자와 부유층의 소득격차도 커졌다.

우리의 주변을 보자. 정보기술의 총아로 떠오른 스마트폰을 사용한 후 우리의 삶이 더 나아졌는가? 우리 모두 쉴 새 없이 스마트폰을 확인한다.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스마트폰만 바라보고 있다. 끊임없이 이메일, 문자메시지, 카카오톡, 페이스북, 트위터가 우리를 찾아온다. 우리는 반응한다. 만약 우리가 계속 인터넷에 반응한다면, 우리가 인터넷의 주인이 아니라 인터넷이 우리의 주인이 되는 것은 아닐까? 스마트폰이 없으면 불안하고 항상 확인해야 하는 강박증이 현대인을 사로잡고 있다. 인터넷 중독은 이제 일상생활이 되었다. 산업혁명이 만든 전력에 대한 과잉의존과 자동차 중독증을 능가할 정도이다.

과학기술이 만든 문명은 두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오늘날 인류는 역사상 유례없는 풍요와 편리함을 누리고 있다. 2011년 '아랍의 봄'에서 볼 수 있듯이 젊은이들의 페이스북과 트위터는 저항운동의 필수 수단이 되었다. 캐나다의 작은 웹사이트는 2011년 '월스트리트를 점거하라' 시위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 2008년 한국의 '촛불시위'와 최근 선거에서도 정보기술의 위력은 막강했다. 이제 정보기술 없는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다. 브리타니카를 밀어낸 위키피디아는 집단지성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과학기술은 어두운 면도 가지고 있다. 산업문명을 지탱하는 엄청난 에너지는 화석 연료에 의존하고 있고, 이는 기후변화와 환경재앙을 야기하고 있다. 원자력발전소는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의 참사를 만들었다. 핵무기 개발이 강대국의 권력수단이 된다면 핵공포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정보기술의 발전도 편리함만 제공하는 것이 아니다. 언제나 어느 곳에서나 비밀 카메라가 있고, 무선전화 위치추적과 신용카드 기록이 개인의 사생활을 낱낱이 기록할 수 있다. 한국의 지하철에서 '개똥녀'가 탄생하고, 인터넷 동영상으로 유명 배우의 사생활이 무참하게 파괴되기도 한다. 사회 전체가 거대한 감시사회가 될 수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악몽이 현실이 될 수 있다. 

과학기술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 수 있다. 과학기술은 축복이 될 수도 있고 재앙이 될 수도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전문가에 의해 이루어지지만, 과학기술의 사용이 소수 엘리트의 소유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핵발전소와 같은 '독재적 기술' 대신 태양열과 같은 '민주적 기술'을 선택하는 것은 대중의 판단에 달려 있다. 과학기술은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성격이 변화할 수 있다. 지속가능한 인류문명을 위해서 과학기술의 민주적 관리가 필수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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