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톨릭대 교수·생명대학원 구은회 교수
죽음은 누구나 언젠가 맞이하는 자연적 현상으로 삶의 마지막 종착점이다. 죽음은 생명뿐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의 상실을 의미한다. 모든 것과의 단절이라는 점에서 죽음은 개인에게 더할 나위 없는 중대한 사건으로 받아들여진다.

어떤 사람들은 죽음을 단순한 과학적 사실, 생물학적 현상 중의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신비적 상상이나 철학적 논의에 대해 냉소적인 태도를 취한다. 죽음이 피할 수 없는 자연적 현상이라면, 죽음에 대한 소모적인 상념으로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감히 죽음을 백안시하고 언제 닥친다고 해도 상관없다는 식의 태도를 취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아무리 노력해도 그 누구도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므로 죽음의 문제에 접근하기를 기피하고, 되도록 은폐하려고 애쓰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이들은 죽음을 통해 평화로운 천상의 안식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며, 어떤 이들은 생명의 근원인 자연에로 회귀하는 것이 죽음이라고 믿고 편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절망하거나, 죽음이 당장 도래할 것은 아니고, 달리 피할 수도 없는 것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려 한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미치면 불안과 두려움이 앞서기 마련이다. 그런데 과연 무엇이 불안하고 두려운가?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은 죽음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타인의 죽음을 통해 관찰한 죽음의 겉모습과 죽음이 남기는 상실감 때문이다.

가까운 지인의 뜻하지 않은 갑작스런 죽음을 통해, 혹은 어떤 이의 예견된 죽음을 통해 우리는 죽음을 가까이서 혹은 멀리서, 간접적으로 혹은 마치 나의 죽음인 것처럼 절실하게 체험하기도 한다. 결국 우리는 죽음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있으며,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불확실한 우리 삶의 전개에서 죽음처럼 확실한 것은 없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다. 그렇게 확실한 것이 죽음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죽음을 체험해 본 일이 없기 때문이다. 죽음은 우리가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죽음을 체험하는 순간 우리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죽음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며 살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가까운 사람의 죽음이며, 아무리 가까이서 지켜보고 있다고 해도, 죽어가는 당사자의 내면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죽음에 대한 이러한 무지와 불가피성이 우리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다.

죽는 순간부터 더 이상 나는 지금처럼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현재의 존재형태로는 더 이상 머무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살아있는 동안 결코 경험할 수 없는 죽음이 과연 나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그릇된 죽음관은 삶을 왜곡시킬 수 있다. 죽음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삶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결정된다.

죽음은 타인이 대신할 수 없는 개별적 인간의 고유한 사건이며, 지극히 개인적인 사건이다. 나의 삶을 타인이 대신 살아 줄 수 없듯이 나의 죽음 또한 나의 것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은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치며,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우리가 어떤 것은 행하고, 어떤 것은 그만두며, 어떤 목표들을 가지며, 어떤 것을 귀중하다고 여기며, 어떤 것을 하찮다고 여기는지, 어떤 열정을 가지고 집중해 살아가는지 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죽음을 보는 관점에 좌우된다. 나의 삶과 결코 별개일 수 없는 것이 나의 죽음이다. 죽은 후에 우리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 혹은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것, 이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태어나기 전에 우리가 없었듯이 죽은 후 우리가 없다는 것이 나쁜가? 만일 어떤 식으로든 달리 계속 살아간다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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