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강강독] 광객과 소요객
[명강강독] 광객과 소요객
  • 고대신문
  • 승인 2012.06.12 13:1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심경호 교수의 여행과 동아시아 고전문학 ③
과거의 여행은 수단, 기간, 장소, 목적 등등이 현재의 여행과 상당히 다르다. 과거의 여행은 우선 범위가 제한되어 있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 김인겸의 '일동장유가',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엔닌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의 여정도 오늘날의 여행보다는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여행이 아무리 공간 영역의 한계를 모를 만큼 장거리에 걸친다고 해도 대개는 스케줄의 시간표에 구속되어 있다. 혜초처럼 귀환하지 못한 자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시를 쓰고, 박지원처럼 한밤에 몰래 숙소를 빠져나와 중국 변방의 상인들과 필담을 나누며, 이언진처럼 오사카의 지정된 사찰 속에서 한 달 넘게 갇혀 지내면서 심란한 꿈을 꾸는 일은 불가능하다.

여행(travel)이 본래 ‘고생’이며, 그 고생 속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나갈 생명력을 되찾는 일이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현대의 여행이 과거의 여행보다 질적으로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런데 조선 중기의 사대부 여행은 대부분 집단 행위였다.  ‘우리 집 산’인 청량산을 주행한 주세붕(周世鵬)이나 고향의 산인 지리산을 종주한 조식(曺植)은, 한 사람은 기흥(奇興)을 추구했고 한 사람은 도심(道心)을 양성했지만, 두 사람 모두 집단의 산행을 했다는 점에서는 공통된다.  

1456년(세조 2) 6월, 여섯 신하가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사형 당하고, 이듬해 6월 단종이  영월로 유배되었다가 10월 24일에서 살해당하자, 1458년 봄, 김시습은 충의의 분노가 일어나서 더 이상 이 ‘개탄스러운’ 세상을 살아나갈 자신이 없었다. 북송 때 도가 진단과 당나라 때 도사 손사막의 풍모를 따라 도사로 나설까 생각했으나 조선의 풍속과는 맞지 않았으므로 승려의 행색을 취하기로 했다. 김시습은 자신의 본래성을 찾는 고독한 방랑길에 올랐다. 그는 자신의 방랑을 ‘호탕한 유람[탕유(宕遊)]’이라 일컫고 ‘깨끗한 놀이[청완(淸翫)]’라고 규정했다. 37세 때는 정치에 참여할 생각으로 서울로 올라왔지만 기대가 무너지자 서울 근교 수락산에 머물면서 유교, 불교, 도가사상을 연구했다. 잠시 환속하기도 했다. 김시습은 높은 지위의 임명 소식을 들을 때마다, “이 백성이 무슨 죄가 있기에 그 사람이 그런 임무를 맡게 되었는가?”라고 여러 날 통곡했다. 농사꾼이 밭 갈고 김매는 형상을 나무로 100여 벌이나 깎아서 책상 옆에 벌여놓고 온종일 응시하다가는 통곡하고는 태워버렸다. 49세 때인 1483년, 김시습은 서울을 완전히 떠나 관동으로 향했다. 현실을 변혁하지 못하는 자신을 자책하면서 수심 가득한 창자를 묻을 곳을 찾아 헤맸다. 김시습은 사상의 육화를 강조했다. 유교인가 불교인가 도교인가 하는 구별을 중시하지 않고, 사상을 체득하고 실천하는 것을 중시했다. 그는 사상이 사상으로서만 권위를 지니고 실생활에서 구현되지 않는 현상을 우려했으며, 스스로 사상을 실천하려고 했다. 

박지원은 1780년에 삼종형 박명원이 진하별사 겸 사은사로 중국에 들어가자, 수행원으로 따라갔다. 박명원은 영조의 부마였다. 이때 박지원은 청나라 지배하의 요동․연경․열하를 여행하면서 보고들은 내용을 기록하고 역사와 문물을 고증하여 󰡔열하일기󰡕를 엮었다. 박지원은, '사기'에서 자객 형가가 연나라 태자 단을 위하여 진시황을 죽이기 위해 역수를 건너려다가 머뭇거렸다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 때 태자 단은 형가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나 의심했다. 그러자 형가는 성을 내면서, “내가 머뭇거리는 까닭은 나의 손님을 기다렸다가 함께 떠나려 함이오!”라고 했다. 그가 기다린 손님이란 누구인가? 박지원은 “형가가 기다린 사람이란 이름을 지닌 어떤 실재하는 인물은 아닐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다시 말해, 형가가 기다린 손님이란 의지를 발동하는 형가 그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박지원은 이렇게 인간의 행동에서 의지의 중요성을 읽었고,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의지를 지닌 인간 주체는 갈등하는 존재요, 스스로 행위를 선택하는 존재다. 그의 중국 여행은 곧 그러한 결단의 행위였다.

명나라 말의 원굉도는 문학이란 ‘자아의 성령을 표현할 뿐 격식에 얽매이지 말아야 한다.’라고 주장했으며, 서안 근처의 화산이나 북경 근처의 반산에 노닐고 감각적인 여행기 속에 자아의 참[眞]을 표현해내려고 했다. 또한 「난정기(蘭亭記)」라는 글에서는 자기의 참을 추구하지 않고 엄벙덤벙 살아가는 속인들을 애처로워했다. 어리석고 속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을 추구하여 눈앞에 죽음이 다가 왔음을 믿지 않으며, 썩은 유학자는 교조적인 이치에 질곡되어 ‘죽음을 무어 두려워할 것이 있는가!’라고 말한다. 하지만 옛사람들도 생사의 문제에 깊이 느꼈다는 점을 환기하라고 가르친다.

서홍조는 호를 하객(霞客)이라 했다. ‘노을 속 나그네’라는 뜻이다. 그는 젊어서부터 매년 여행을 떠났지만, 51세 되던 1636년 가을에는 대 여행을 계획하여, 절강(저장)‧강서(장시)‧호남(후난)‧광서(광시)‧귀주(구이저우)‧운남(윈난) 등지를 4년 동안 돌아다녔다. 여행 그 자체를 좋아해서 여행을 했고, 그러는 사이에 인간 삶의 자연환경과 인문환경에 대해 깊이 성찰했다. 서홍조는 오대 명산보다도 아름다운 산으로 ‘황산’을 발견했다. 또한 운남을 가로질러 금사강‧난창강‧여강의 수원을 실제로 조사하고, 󰡔상서󰡕 「우공」에서 민강이 장강의 근원이라고 적은 것은 잘못이고 금사강이야말로 장강의 상류라고 밝혔다. 경전의 권위를 전복시키고 경험적 진실을 더 존중한 것이다.

에도시대의 시인 마쓰오 바쇼(松尾芭蕉)는 41세 때인 1684년 8월에 ‘노자라시 기행(野ざらし紀行)’에 올랐다. ‘노자라시’는 ‘들판의 해골’ 이라는 뜻이다. 그는 “野ざらしを心に風のしむ身かな(들에 뒹굴리란 / 이 마음에 바람은 / 파고드누나).” 라고 노래했다. 천리 여행을 떠나는데 식량을 준비하지도 않고 깊은 밤 달빛을 받으며 자연 그대로의 이상향으로 들어간다고 생각하면서 옛 사람의 정신을 따라 여행길에 올랐다. 1689년 3월 하순에는 문하생 가와이 소라(河合曾良)를 대동하여 에도를 출발해서 ‘오쿠노호소미치’의 여행을 떠났다. 오쿠는 일본의 오지였던 동북지방을 가리킨다. 9월 3일에 나고야 북서쪽 오오가키(大垣)에 도착했으니,  7개월에 걸쳐 약 2,400킬로미터를 걸었던 것이다. 야마가타현과 아키타현에 해당하는 데와(出羽) 지방으로 가려고 시토마에 관문을 넘으려고 했을 때는 사흘간 비바람에 막혀 있게 되었다. 바쇼는 이렇게 읊었다. “蚤蝨馬の尿する枕もと(벼룩 이 끓고 / 말이 오줌 갈기는 / 방랑길 숙소).” 삶이란 이런 것이리라. 우아하지도 찬란하지도 않다. 개운치 않은 맛, 시큼한 냄새, 어수선한 잠자리, 이것이 삶이다. 마음의 안정과 구도를 위해 떠난 방랑의 길이 외견상 고요하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내면의 고통을 더 드러내고 불안의 감정을 더 유발한다. 이 여행에서 바쇼는 황량한 풍토를 바라보면서 불안과 비애의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그것을 매우 감각적이고 찰나적인 언어로 표현했으며, 우주와 인간사의 무상함을 응시하면서 찬란한 슬픔을 곱씹었다.
여행은 자신을 허무 속으로 내던지는 행위이다. 거기서 살아 돌아올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껏 안주하던 공간에서 훌쩍 떠날 수 있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광객과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소요객만이 그 일을 결행할 수가 있다. 언제 떠나야 좋은지 점을 치지 말자. 에도의 서민들이 말했다. “길 떠날 날의 길흉을 점칠 때는 도무지 마음먹기 어려운 법, 작심하고 떠나는 날을 길일로 삼자.” 

심경호 문과대 교수·한문학과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