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성적처리가 끝남과 동시에 7월 초 일주일간 진행된 제3차 한-러 대학생대화를 마치고 느낀 점이 적지 않았다. 올해로 세 번째를 맞이하는 한-러 대학생대화는 양국에서 선발된 총 40명의 대학생의 대표들이 그 해의 한러대화(Korea-Russia Dialogue) 전체 주제와 관련된 내용을 청년의 눈높이에서 토론하고 그 결과를 건의서나 정책제안서의 형태로 양국 정부에 보고하는 방식의 차세대리더포럼이다. 작년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진행된 2차와 올해 한국에서 진행된 3차 대학생대화의 한국 측 단장을 연이어 맡은 나는 두 번의 여름을 양국의 젊은이들과 함께 하며 참가한 대학생들의 마음속에 두 가지를 꼭 새겨주고 싶었다. 그 하나는 동북아지역 근현대사에서 러시아가 일정하게 담당한 긍정적 역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또 하나는 구한말에 나라의 주권을 지키지 못한 채 열강의 도움에 매달렸던 무기력한 우리 조상의 실상에 대한 뼈아픈 자각과 미래지향적 반성의 촉구였다.

작년 여름 러시아 측 프로그램의 일부를 수정하면서까지 단장인 나의 고집으로 강행한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북방묘지 답사는 참가한 한-러 대학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거기서 우리는 고(故) 이범진 공사의 묘소를 참배하였고, 잠깐이나마 격동의 근대사를 양국의 입장에서 담담하게 돌아보고 토론할 기회를 가졌었다. 이범진 공사는 대한제국의 사실상 처음이자 마지막 주러시아 공사로서 고종황제의 특명으로 대러시아 및 대유럽외교를 통하여 기울어가는 국권을 지키려고 애쓴 외교관이었다.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병합 이후 공사로서의 법적 지위가 사라지자 결연히 자결을 선택하여 항거의 메시지를 남긴 공사의 유해를 당시 러시아 황실은 최고의 예우로서 수습하여 장례식을 치러주었다. 우리의 관심에서 사라진 공사의 묘소를 2002년에 한러수교 10주년 기념행사의 후속으로 진행된 유라시아 대륙횡단 청년페스티벌을 통하여 확인한 후 양국 정부는 공동 노력으로 이범진 공사 추모비를 세워 관리하고 있다. 그곳을 파란 눈의 러시아 대학생들과 함께 참배하여 양국 역사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을만한 장면을 하나라도 실제로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올해 여름 한국 측이 준비한 프로그램엔 서울 정동의 구러시아 공사관 터 답사 일정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일행은 주한러시아대사관의 드미트리 꿀낀 서기관이 러시아의 시각에서 간략하게 설명해준 아관파천 전후 시기부터 현재까지의 한-러 교류사를 경청하였다. 1884년 조러수호통상조약 체결 이후 러시아는 지금의 정동 일대에 상당한 부지의 공사관 터를 제공받아 당시의 조선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하였고,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에 고종과 친러파 대신 일행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 왔을 때 적극적으로 임시집무실을 제공하면서까지 일제로부터의 보호막 역할을 자처하였다. 러시아의 진정한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별도의 깊은 연구가 필요한 사안이기에 나는 우리 학생들에게 일국의 황제가 부녀자의 가마에 몸을 숨겨 외국공관에 피신하려 했었던 이 단순한 역사적 사실만을 잊지 말고 기억하자는 “전사불망 후사지사(前事不忘 後事之師)”의 정신을 간직하자고 당부하였다.

영원한 광복군으로 우리의 기억 속에 늘 뜨겁게 남아있는 고(故) 김준엽 총장님의 일주기를 추모하는 특별전시가 6월초에 서관 로비에서 진행되었던 터라 이번 여름방학을 관통하는 내 마음 속 성찰의 주제는 줄곧 그분의 어록 중의 “현실에 살지 말고 역사에 살라”는 음성이었다. 내가 평생 간직하고 있는 메시지와 교훈을 작년과 올해 한국과 러시아 양국의 엘리트 대학생들과 역사의 현장에서 함께 하며 같이 나눌 수 있어서 정말 좋았다. 그 느낌을 간접적이나마 고려대의 전체 독자들과 공감하기를 있기를 기대하며 이번 학기 마지막 탁류세평 칼럼을 마친다.

김진규 문과대 교수·노어노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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