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호의 정치 경제학 비판』에서 보드리야르는 사용가치에 근거를 두고 있는 맑스의 정치 경제학을 비판한다. 또한 상품의 형태가 기호의 형태로 전화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기존의 산업사회를 설명하는 개념적 범주와 가치로는 더 이상 새롭게 변화를 겪는 우리 사회를 설명하기 어려움을 암시한다. 이를 통해 그는 맑스와 거리를 두게 된다. 그리하여 현대의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기호의 생산이 사물의 생산을 대체하고 기호와 코드가 지배하는 의미작용의 체계가 생산양식을 대신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육체에 관한 우리의 모든 문화는 육체적인 욕망을 표현하는 것 뿐 만 아니라 그것을 입체적으로 전달하는 과정에서도 과도한 기호체계를 작동시킨다고 볼 수 있다. 그리하여 늘 벌거벗은 채로 사는 어느 원주민에게 있어서 벗은 몸이란 특별한 육체적 기호로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벌거벗은 것에 불과할 뿐이며 나체를 객관적인 대상으로 기호화 하지 않는다. 그런 종족의 문화 속에서 육체란 그저 얼굴과 마찬가지의 기능을 할 뿐이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육체는 음란한 것도 외설스러운 것도 아닌 것이다. 그저 벌거벗은 채로 보여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육체가 물신화 되어 대상으로 꿈틀거리는 문화권 속에서, 육체는 얼굴과 구별될 뿐만 아니라 유혹의 대상으로 태어난다. 여기에서 육체란 우리의 눈에 과도하게 드러나는 욕망의 기호로 기능한다. 외설스런 육체가 완전한 승리를 거두고 얼굴이 의미를 상실하게 되는 단계가 바로 포르노인 셈이다.

실제적인 성행위의 관점에서 보면 포르노에서 보여주는 것과 같은 실재의 세계란 그저 상상의 세계일 뿐 이다. 과도한 흥분과 쾌락, 과도한 행위들의 난무를 바라보면서 그곳에 시선을 몰두하고 있는 관찰자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개별적 성행위를 오히려 불완전하고 잘못된 어떤 것으로 여긴다. 그리하여 이상화된 대상을 쫓아 상상적 조루 상태에 빠지는 경험을 하게 되기까지 한다.

그리하여 보드리야르는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고 있는 성욕이란 생물학적 의미에서 이해되기보다는 ‘그리 오래되지 않은, 우리의 의식에 익숙해진 하나의 습관’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화에선 성행위 자체가 궁극적 관심의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 관련된 소비가 주요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강제적 사정행위를 할 뿐 아니라 생산의 곡선을 따라 움직인다. 사랑 행위 역시 이러한 결론을 끌어내기 위한 과도기적 단계라는 가설을 내세우면, 좀 심한 억측이라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까?

자연스럽게 욕망을 표출하는 단계를 넘어버린 현대인은 욕망이란 언제나 즉각적으로 실현되어야한다는, 강압적인 보이지 않는 요구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도처에 숨겨져 있는 욕망과 충동의 코드에, 기계적인 체계에 기능적으로 잘 맞춘 채 톱니바퀴처럼 움직인다. 심지어 우리는 이런 환청에 시달리게 된다. ‘너는 성욕을 가지고 있으니 소비해야한다, 너의 무의식은 그것을 말해야 한다, 너는 육체를 가지고 있으니 그것을 향유해야 한다.’ 등.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우리의 육체는 성 적인 것만을 담아내는 그릇으로 기능할 뿐 더 이상의 의미는 거기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기호학적 가치가 상품 생산과 소비 과정에만 국한되어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상징적 기호체계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자체를 구성하고 창출하며 우리의 구체적 삶에 깊게 관여한다. 성을 통한 소비문화는 모든 사물의 진실코드를 성이라는 요소에 초점을 맞추게 하고 외모와 태도를 성적 자극이라는 코드에 맞추게 하는 문화를 만들어낸다. 요즈음 우리가 우려하고 있는 외모 중심사회의 대표적 징후군인 성형신드롬이나 섹시 다이어트 등이 바로 그 증거라 할 수 있다.

우리 삶에 깊게 침투해 있는 성을 매개로 한 소비문화는 상품 판매라는 초기의 목적 실현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의식 틀을 그것에 맞게 바꾸어가고 무의식중에 세뇌시킨다. 이는 모든 것이 기호와 코드로 조작되는 후기 산업 사회에서 구체적인 상품과는 분리된 ‘기호’가 불러일으킨 욕망에 의해 구매 행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결국 실제 상품과 진짜 욕망의 만남이 아니라 ‘상징적 기호’와 ‘가짜 욕망’의 만남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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