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동방예의지국이라 불려온 우리나라인 만큼 상대방에 대한 배려, 겸손의 미덕이 일상 대화에 녹아 있다. 특히 우리말의 ‘빈 말’ 표현은 무심코 흘려 사용되지만 그 뜻을 곱씹어 보면 듣는 이에 대한 사랑이 담겨 있다. 우리말의 ‘빈 말’ 표현이 갖는 의미를 가상의 이야기를 통해 살펴봤다.


- 고려대에 재학 중인 고대신 씨는 3·4교시를 듣기 위해 강의실로 가던 중 같은 수업을 듣는 외국인 친구 쿠키(Kukey) 씨를 만났다. 고대신 씨는 반가운 마음에 인사했다. “안녕, 쿠키. 밥 먹었어?”
‘밥 먹었어?’라는 표현은 상대방의 식사 여부를 묻는다기보다 안부를 묻는 역할을 한다. 시간대에 따라 ‘아침 먹었어?’, ‘점심 먹었어?’ 등으로 묻는 경우도 있다. 식사에 관련된 인사 표현이 많은 이유에 대해 문금현(숙명여대 한국어문학부) 교수는 “밥을 중요시하는 우리 민족의 문화를 엿볼 수 있다”며 “식량 사정이 어려웠던 옛날부터 식사가 중요한 관심사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도원영(민족문화연구소) 교수는 “글자 자체로는 별 의미 없는 표현이지만 대화를 시작해서 이어가는 역할을 하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고 말했다.

-내일 전공 시험이 있어 공부 중이던 고대신 씨는 같은 수업을 듣는 친구 엘리제 씨가 공부하는 모습을 보고 말을 걸었다. “안녕, 엘리제. 공부 많이 했니?”
‘공부 많이 했니?’라는 표현을 대학생 사이에서 쓸 경우, 공부를 많이 했는지의 여부와 관계없이 시험을 앞둔 상황에서 주고 받는 인사의 역할을 한다. 다만 이 표현은 대학생 사이에서만 빈 말로서 기능하는 경우가 많다. 또래 간 경쟁의식이 대학생보다 치열한 편인 중고생에게는 상대방을 견제하려는 심리에 기인한 발화로도 해석할 수 있다.

- 쿠키 씨와 이야기를 나누던 고대신 씨는 쿠키 씨와 헤어지며 이렇게 말했다. “잘가, 쿠키. 조만간 밥 한번 먹자.” 쿠키 씨는 고대신 씨의 말을 듣고 고대신 씨를 저녁 식사에 초대했다.
‘밥 한번 먹자’, ‘술 한잔 하자’의 표현 역시 흔히 쓰는 빈 말이기 때문에 한국에 처음 온 외국인이 종종 이해할 수 없는 경우도 생긴다. 오스트리아에서 온 교환학생 에스더(Esther, 경영대 경영13) 씨는 “한국에서 시티투어를 하다가 친해진 한국 친구들이 점심을 가까운 시일 내에 먹자고 해 기다렸지만 아직까지도 연락이 없다”고 말했다.

- 고대신 씨는 쿠키 씨 가족에게 줄 선물을 고르기 위해 상점에 들어갔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찾지 못해 빈손으로 상점을 나서며 고대신 씨가 말했다. “조금 더 둘러보고 올게요”
“한번 더 둘러보고 올게요” 등의 표현은 점원에 대한 예의를 지키기 위한 말이다. 문 교수는 “미안한 마음을 덜고 상대의 체면도 살려주는 표현”이라며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가치관이 드러난다”고 말했다.

-다른 곳에서 선물을 산 고대신 씨는 즐거운 마음으로 쿠키 씨 집에 방문했다. 고대신 씨는 현관을 열어주신 쿠키 씨의 어머니인 뉴스(News) 부인에게 선물을 드렸다. 뉴스 부인은 활짝 웃으며 “오시느라 힘드셨을 텐데 뭘 이런 걸 다 준비하셨나요”라고 말했다.
이 표현은 고마움을 표현하려는 본래의 심정이 반어적으로 표현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도 교수는 “빈 말이 맥락을 벗어나 늘 예의를 차리기 위해 쓰이는 것은 아니다”라며 “이 경우 대화 속 화자와 청자가 처한 상황과 심리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 뉴스 부인은 한국인 친구가 많아 한국어로 곧잘 말할 수 있다고 하셨다. 잘 차려진 음식을 권하며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요”라고 능숙하게 한국어를 구사해 고대신 씨를 놀라게 했다. 뉴스 부인이 준비한 음식은 스테이크였다. 마지막 남은 한 조각을 두고 고대신 씨는 포크를 내려 놓았다. “저는 배불러요. 어서 드세요”
‘음식이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나 ‘차린 건 별거 없지만 많이 드세요’ 등의 표현은 화자의 겸손을 함축한 빈 말이다. “저는 배부릅니다. ~께서 드세요”라는 표현 또한 상대방에 대한 배려와 양보의 심리를 나타낸 빈 말 표현이다. 문 교수는 “빈 말 표현에서 ‘겸손’과 ‘양보’의 표현을 찾아보기 쉬운 이유는 우리가 그만큼 양보와 배려의 미덕을 큰 가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 즐거운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느덧 밤이 깊어졌다. 쿠키 씨와 한창 이야기꽃을 피우던 중 고대신 씨의 부모님이 집에 오라고 재촉했다. 고대신 씨는 외투를 입으며 “버스타고 가는 중이에요”라며 얼버무렸다.
‘지금 가고 있다’ 등의 표현은 약속을 제때 지키지 못할 때 쓰는 표현으로 빈 말과 거짓말의 중간적 속성을 갖고 있다. 화자 스스로의 핑계면서 상대방의 기분이 나빠지지 않게 하기 위한 심리 역시 담겨 있다. 교환학생 에리얼(Ariel) 씨는 “한국인들이 늦을 때마다 ‘다 왔어, 다 왔어’라며 오곤 했다”며 “종종 겪는 일이다”라고 말했다.

- 쿠키 씨 가족의 배웅을 받으며 고대신 씨는 “저희 집에도 한번 놀러오세요”라며 아쉬운 마음을 뒤로 했다.
대화의 말미에 초대를 뜻하는 말을 할 때도 빈 말을 쓰는 경우가 있다. 한국인의 경우 화자는 청자가 정말 방문을 하든 하지 않든 별 상관이 없는 정도의 빈 말이다. 일본인은 완전한 빈 말인 경우가 많다. 문 교수는 “일본인이 초대를 허락한다면 월, 일을 정확히 말해줄 때 초대의 의사가 있는 것이지, 의례상 하는 말에 진짜 놀러간다면 오히려 무례한 사람으로 오인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같은 민족이어도 새터민은 이와 달라 지키지 못할 약속은 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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